Décadence.

나의 사유

by 지훈

지금까지의 내 입장을 정리해 본다.

인간은 끊임없이 판단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존재다. 진리가 사라진 세계 속에서, 우리는 무의미한 것들 위에 의미를 새기려 한다. 불확실한 세계를 확실한 질서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그러나 바로 그 시도가,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매달리는 대상은 대부분 기존의 질서,사회적 규범, 도덕적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지만, 이제는 우리를 지배하는 무언가가 되었다.


헤겔의 정(正), 반(反), 합(合) 구조에서, 나는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기존의 정을 더욱 강력한 정으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보고자 한다.


이전의 정은 너무나도 강력해졌다. 그리하여 정이 원래담고 있었던 의미는 죽어버리고, 그저 포장지, 텍스트만이 남았다. 그 텍스트는 이제 껍데기만 남은 채, 맹목적으로 숭배되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전의 질서는 반(反)의 도전을 철저히 억누른다.

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움직임은 절대다수의 권력에 의해 짓밟힌다. 그 결과, 합(合)은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정신이 아니라, 단지 더 강화된 정의 반복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절대정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정을 절대정신이라 강요받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 정당화의 수단은 폭력적 권위이자 은밀한 강요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은 정신이 제거된 허울, 건강하지않은 껍데기만으로 기능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껍데기를 어떻게 직면할 수 있는가?

나는 정을 의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데카당스, 곧 죽음을 인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모든 인간의 산물은 죽는다.

모든 사유는, 모든 언어는, 모든 텍스트는 죽는다.

심지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문장조차 지금 이 순간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죽어가는 것들에 다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또다시지워내고, 또다시 새기는 끝없는 반복을 긍정해야 한다. 그 연속성을 긍정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창조의 주체로다시 선다. 그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진정한 기능이며 승리다.


그런데 왜 많은 이들은 이 죽음과 창조의 연쇄를 모른 채 살아갈까? 아니, 왜 모르려고 애쓰는 것일까?


그 답은 곧 기존의 정이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줄 알면서도, 그것이 살아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인간을 안일한 껍데기 속에 가둔다.


정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게 만들려 한다. 그것이 바로 정의 진짜 속셈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에 기대어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자들, 사회 속에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입증받고 싶은 자들이 이 정의 허울을 붙잡고 늘어진다.


그들은 말한다.

“정답은 여기 있다.”

“이 방식이 맞다.”

“이 틀 안에 머물러야 살아남는다.”


그 결과, 우리는 어느 순간 눈을 가린 채 살아가고 있다.정의 논리로 둘러싸인 검은 안대가 우리의 시야를 덮고, 우리는 빛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빛을 보았다고 믿기 위해 어둠 속을 헤맨다.


그 눈을 가린 것은 단지 사회가 씌운 천 조각만이 아니다. 성공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말, 다들 이 길을 간다는 목소리, 이제는 AI를 알아야 살아남는다는 외침, 끊임없이 주입되는 자기 계발의 정답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안대로 가두는 장치다.


그들은 말한다.

“이 시험만 통과하면, 이 회사에 들어가기만 하면, 이 연봉을 받기만 하면, 너는 빛을 보게 될 거야.”

그러나 실상은 안대를 벗지 않고도 빛을 본 척하며 살아가라는 명령일 뿐이다.


하지만 빛은 오지 않는다.

우리는 캄캄한 안대 속에서, 실체 없는 허상만을 좇고 있다. 우리는 그 빛을 보기 위해 안대를 벗는 것이 아니라, 그 목소리에 이끌려 안대를 더 단단히 고정한 채 움직인다.

어둠 속에서, 안대를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그저 말해진 방향대로 걷다가 죽음 속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물론, 그 편이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

모두가 같은 안대를 쓰고, 같은 목소리를 듣는다는 사실은 이상하리만큼 안도감을 준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합리화를 배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니까.”

“다들 그렇게 사니까.”


어떤 이들은, 안대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벗는 데서 오는 고통이 두려워 차라리 눈 감고 사는 삶을 택한다.


그러나 진실은 이렇다.

우리는 빛을 바란다.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꿈꾼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좇고 있는 것은

빛이 아니라, 껍데기뿐인 대상이다.

허상이며, 언젠가 사라질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 누구보다 더 비극적이고 불쌍한 존재가 있다. 심지어 나조차도 그 부류에 속해 있다.


그들은 어렴풋이, 혹은 뚜렷하게 빛이 있다는 것을 안다. 안대가 씌워져 있다는 사실도, 이 삶이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임도 인지한다.


중요한 건, 그 앎이 단순한 글자로서 알게 된 것. 어쩌면원치 않았지만, 결국 자각하게 되어버린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안대를 벗으려 한다.

처절하게. 희망을 품고, 광휘를 기대하며.


하지만, 벗고 나서 보게 되는 것은 찬란한 해방도, 새로운 시야도 아니다. 또 다른 안대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잠시 시야는 열렸지만, 곧바로 다시 어두워진다. 그 안대를 씌운 이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다. 스스로 씌운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타인의 손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허탈함에 빠진다.

이 모든 노력이 단 한순간을 위해서였는가.

모든 시도는 허망했고, 그 허망함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라는 절망으로 되돌아온다.

그리하여 그들은 살아가는 시간과 모든 환경을 냉소적으로, 조롱하듯 바라본다.


심지어, 자신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안대를 쓰라고 권하기도 한다.

마치 자신이 선지자인 양.


스스로는 “이 모든 것을 긍정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도 결국은 포기하려 한다.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철학적 사유는 단 하나다.


자살.


시지프가 영겁의 오르막을 마주했을 때, 그 정상 위에서 다시 아래를 바라보며, 이제 또다시 굴러야 한다는 현실을 마주했을 때, 그가 느꼈을 법한 절망.


살아갈 이유는 없다고 느낀다. 남은 고통의 시간, 그 반복되는 비극을 스스로 끊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 스스로라는 말조차도 허울뿐이다.

그것은 단지 포기이며, 순응일 뿐이다.

그마저도 번들거리는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 이 모든 것이 허망하다면, 다시 말해 안대를 벗는 행위조차 무의미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정말 살아갈 이유는 없는가.

정말 자살만이 남은 유일한 철학적 선택인가.

무의미를 알고, 껍데기를 알고, 반복을 안 자에게는 어떤 의미가 남아 있는가.


이 지점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Amor Fati.

모든 것이 반복되고, 모든 가치가 죽은 이 세계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Yes)”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

그가 말한 초인은 완성된 인간이 아니라, 무너진 진리와 도덕을 본 뒤에도 다시 살아내는 자이다.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복을 창조의 재료로 삼는 자.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시 붓을 들고 새로운 선을 그어보는 자. 정의 껍데기를 찢고, 자신의 리듬과 시선으로 세계를 다시 직조하는 자.


그는 말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기존의 인간, 안대를 쓰고 허위의 빛을 좇던 인간을 넘어, 무의미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자. 그 자만이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카뮈는, 그보다 더 부드럽고 처연한 목소리로 말한다.


삶은 부조리하다.


의미를 바라는 인간과,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 세계 사이의 간극. 그 절망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는 말한다. 철학적 자살은 해답이 아니다.

삶이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순간, 우리는 두 가지 선택지 앞에 선다.


하나는 삶을 포기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는 후자를 택한다.


반항하라. Revolte.

무의미를 껴안고도, 반복을 알면서도, 그 반복 속으로 다시 발을 들이는 자야말로 진정으로 살아 있는 자다. 카뮈는 그렇게 말하며 시지프를 우리 앞에 다시 세운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

그는 무거운 돌을 끌어올리는 존재가 아니라, 돌을 다시 굴리면서도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존재다.


결국 남는 건 이 한 문장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대를 쓰고 살아가도 지옥이고, 안대를 벗고 또 다른 어둠을 보아도 고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쓰고, 다시 지우고, 다시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긍정이며,

죽음을 아는 자가 끝내 택할 수 있는 가장 창조적인 반항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조차 부끄럽다.

나는 아직 이 말을 실천하지 못했고, 되려 니체와 카뮈를 빌려, 그들을 소비하며 살아가는 익명의 누구에게 말하고 있다. 그들이 말한 고통의 주체, 되풀이를 긍정하는 자, 반항하는 인간이 되지 못한 채, 그저 문장 위에서만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위버멘쉬가 아니며, 시지프조차 못 된다.

나는 아직도 반복을 두려워하고, 안대의 유혹에 귀 기울이며, 껍데기의 질서에 안도하는 누추한 존재다.

부끄럽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 부끄러움을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기에 도전해보려 한다.

진정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지워내고 새기고 또 지워내는 그 무의미한 과정을, 어떻게 긍정할 수 있는지를, 어떻게 내 손으로 의미를 새길 수 있을지를, 나는 치열하게 사색해보려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머릿속 사유가 아니라, 텍스트로만아는 지식이 아니라, 살면서 온몸으로 체감하고, 고통 속에서 내 손으로 긋는 진실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이 글로, 그 첫 문장을 다시 새기려 한다.

그리고 언젠가, 이 글을 누군가가 읽고, 안대를 잠시라도 인식할 수 있다면, 심지어 그것이 미래의 나라고 하더라고,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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