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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Jul 18. 2022

#5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낭만적인 프러포즈는 아니지만


#5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낭만적인 프러포즈는 아니지만


*주인공 : 미연 / 진우 


매미 울음소리가 귓가를 울리던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진우는 서둘러 퇴근을 하고 백화점으로 갔다. 혼자서 백화점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을 미처 다 끝마치지 못했음에도 진우가 오후 6시 정각에 딱 맞추어 퇴근을 이유는 단 하나, 프러포즈용 반지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연인인 미연과 만난 지 벌써 6년하고도 3개월이 지났다. 이젠 결혼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변함없이 자신을 곁을 지켜준 미연과 한 시도 떨어져 있기 싫었다. 미연과 함께 집을 나서고,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이른 아침의 맑은 공기를, 늦은 밤의 서늘한 공기를 다른 누구도 아닌 미연과 함께 쐬고 싶었다. 

언젠가 은근 슬쩍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미연은 이렇게 말했다.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프러포즈 제대로 안 하면 결혼은 기대도 하지 마!” 

진우는 생각에 잠겼다. 미연이 말하는 제대로 된 프러포즈란 도대체 무엇일까. 분위기 좋은 호텔의 스위트룸을 빌려, 헬륨 풍선을 한가득 띄어놓고, 무릎을 꿇고 미리 준비한 반지를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에 끼워주는 것. 그것이 미연이 원하는 프러포즈일까? 
 
 끝없이 피어오르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진우는 무작정 백화점으로 간 것이었다. 일단 프러포즈용 반지부터 사고자 마음먹었다. 다행히 미리 봐둔 반지가 있었다. 많은 여성들의 로망이라 불리는 브랜드의 제품. 민트색 박스가 상징인 바로 그 브랜드. 

500만 원이 훌쩍 넘는 고가의 반지였지만, 미연에게 꼭 사주고 싶었다. 이날을 위해 값비싼 명품 시계나 벨트, 외제차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열심히 월급의 일부를 저축해 왔던 진우였다. 셀러가 이런저런 제품을 추천해 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진우는 미리 인터넷으로 점찍어두었던 반지를 구입했다. 사이즈가 없으면 주문을 해야 된다고 했지만, 다행히 미연의 손가락에 딱 맞는 사이즈가 있었다. 현금으로 전액 결제를 하겠다며 5만 원 지폐 다발을 건네자 셀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시선을 무시한 채, 재빨리 결제를 마친 진우는 가방 속에 반지를 잘 챙겨 넣고 미연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 마트에 들러 그녀가 좋아하는 사과도 샀다. 어림잡아 천 개의 사과가 뒤엉켜 진열되어 있는 코너에서 진우는 매의 눈으로 윤기가 흐르고, 과육이 단단하고, 멍이나 흠집이 없는 것을 골라냈다. 사과 한 알에 아이처럼 좋아할 그녀를 생각하니 마음이 바빠졌다. 진우는 서둘러 차를 몰아 미연의 집으로 향했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일까? 거실에 있었을 것이 분명할 미연은 현관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미연은 진우를 와락 안아주었다. 서로가 집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 꼭 안아주는 것. 이것은 그들이 연애 초창기부터 정했던 룰이었다. 6년하고도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진우와 미연은 그들이 정한 규칙을 꼭 따를 정도로, 아니 한시도 어긴 적이 없을 정도로 사랑이 넘치는 커플이었다. 

진우를 안아준 미연은 곧바로 진우의 손에서 흰 비닐봉지에 담긴 붉은색 사과 네 알을 낚아채었다. 오랜만에 먹는 사과에 신이 난 미연. 순식간에 주방으로 달려가 사과를 예쁘게 깎아 접시에 담아 거실로 나왔다. 그 사이 진우는 옷방으로 들어가 셔츠를 벗고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프러포즈용 반지가 담긴 가방은 입고 온 셔츠로 잘 덮어둔 채로.

진우와 미연은 평소 두 사람이 같이 즐겨보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사과 네 알을 해치웠다. 언제나 예쁜 미연이었지만, 사과를 넣고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먹는 모습은 유난히 진우를 더 설레게 했다. 사과로는 도무지 배가 부르지 않다는 미연을 위해 진우는 라면도 끓였다. 칼칼한 맛을 더하기 위해 잘게 썰어 냉동실에 미리 얼려두었던 청양 고추도 넣었다. 풍미를 더해줄 다진 마늘도 한줌 넣어주고, 고추기름도 두어 방울 떨어뜨려주었다. 미연이 좋아하는 계란도 젓가락으로 휘휘 풀어 넣어주었다.

진우가 혼신의 힘을 다해 끓인 라면을 미연은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먹어치웠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미연의 이마와 인중은 땀으로 가득했다. 식탁 위의 티슈를 한 장 뽑아 미연의 땀을 닦아준 진우. 설거지까지 끝마치고 피곤해 보이는 미연을 침대로 이끌었다. 

미연은 요즘 대형 출판사와 계약한 소설의 원고를 마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밤을 꼴딱 지새우는 날도 숱하게 많았다. 끼니를 거르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토록 원하던 대형 출판사와 계약한 첫 작품이었기에 미연은 더욱 신경이 곤두섰다. 잘 해내고 싶었다. 좋은 작품을 써서 세상에 선보이고 싶었다. 자신의 작가 인생에 길이 남을 대작을 완성하고 싶었다. 자꾸만 욕심이 났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두 눈은 계속 벌겋게 충혈되기 일쑤였고, 심한 스트레스로 위경련도 수시로 찾아왔다. 3시간에 한 번씩 위가 쥐어짜듯 아팠다. 심지어 머리도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자신을 몰아붙였다간 큰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미연은 담당 편집자에게 양해를 구하는 메일을 보냈다. 마감 기한을 조금만 늦춰달라고. 

내부 회의 끝에 편집자는 마감 기한을 한 달 정도 늦춰주겠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미연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진우를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안아줄 수 있었다. 진우가 끓여준 라면도 더더욱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자신을 대신해 꽃분홍색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는 진우를 뒤에서 살포시 안아줄 여유도 생겼다. 


식기세척기보다 더 깔끔하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설거지를 마친 진우가 자신을 침대로 이끌 때도 벌써 눕지 않아도 된다며, 전혀 피곤하지 않다며 고개를 가로졌던 미연이었다. 하지만 막상 침대로 가니, 그간 축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며 금세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진우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잠이든 미연을 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어떻게 프러포즈를 해야 좋을까. 원래는 라면을 맛있게 먹은 미연을 침대가 아닌 집 근처 분위기 좋은 와인 바로 이끌 생각이었다. 
 
 오랜 시간 드나들며 친분을 쌓은 헤드 매니저에게 부탁해 와인 바 중앙에 있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그녀가 감동을 받은 사이 슬며시 반지를 가녀린 손가락에 끼워줄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피곤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도저히 침실로 이끌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도 피곤하지 않다며 애써 웃어보였던 그녀였지만, 침대에 눕자마자 그녀는 진우의 예상처럼 곧바로 잠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진우는 곤히 잠들어버린 미연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이나 프러포즈 방법을 고심했다. 하지만 마땅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일로 미루기는 싫었다. 오늘 꼭 그녀에게 나와 결혼해달라고, 평생을 함께해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하고 싶었다. 한 세 시간쯤 후에 그녀를 깨워보기로 결심했다. 


자신까지 그녀의 곁에 누워 잠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진우는 미연의 작업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소설 집필에 필요한 각종 책들이 작업실 책상과 바닥에 널려있었다. 혹시라도 책에 발이 걸려 미연이 넘어질까 봐, 진우는 주섬주섬 책을 들어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책상 위를 나뒹굴던 휴지와 과자 부스러기들도 깔끔하게 치웠다. 청결 상태가 거의 완벽에 가까워진 작업실을 보며 좋아할 미연의 얼굴을 떠올리니 기분이 좋아진 진우. 냉장고로 걸어가 시원한 무알콜 맥주 하나를 꺼내어 마시며 잠시 열정적인 청소로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시 뒤, 미연이 거실로 나왔다. 겨우 2시간 반 만에. 한결 개운해진 표정으로 곁으로 다가오는 미연을 진우는 꼭 안아주었다. 헝클어진 머리칼도 부드러운 손길로 정리해 주었다. 한참을 진우 품에 안겨있던 미연은 모처럼 생긴 여유를 이렇게 날려버릴 수 없다며, 산책이라도 가자고 말했다.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미연은 냉큼 옷을 갈아입겠다며 옷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구입해 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으러 옷방으로 뛰어 들어온 미연은 진우가 입고 온 셔츠를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일었다. 예전에도 진우랑 똑같은 문제로 크게 다툰 적이 있다. 진우가 청소를 잘 하지 않는 편은 아니지만, 항상 입었던 옷이나 양말을 아무 데나 마구잡이로 던져놓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본인이 주워서 세탁기에 넣긴 하지만, 미연은 바닥을 뒹구는 진우의 옷가지들이 너무 보기가 싫었다.


워낙 잔소리를 많이 했던 터라 이제 좀 그 습관이 고쳐졌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세상에나, 또 흰색 셔츠를 옷방 선반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둔 것이 아닌가. 밀려오는 짜증을 간신히 억누르며 셔츠를 들어 올렸는데 못 보던 민트색 상자가 눈에 띄었다. 


‘아니 혹시 이건?’


미연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상자 크기를 보아하니 반지인듯 했다. 자신의 추측이 맞는다면, 진우는 오늘 자신에게 프러포즈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렇게 숨겨둔 것을 보면 깜짝 놀라게 해 주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잠들어버려 적정한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을 것이고. 지금도 아마 언제쯤 프러포즈를 해야 할지, 또 어떤 방식으로 하는 것이 좋을지 골똘히 고민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미연은 고민에 빠졌다.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줄까, 아니면 지금 이대로 민트색 박스 들고 거실로 뛰쳐나가 나한테 프러포즈 하려고 했냐며 환하게 웃어줄 것인지. 결국 미연은 전자를 택했다. 옷을 갈아입고 모른 척하며 거실로 나가니 이게 무슨 일인가. 진우가 소파에서 곯아떨어져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집에서 푹 재우고 싶었지만, 내일부터 진우가 3일간 지방 출장이 예정되어 있는 터라, 집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깨워서 집으로 보내야 했다. 


미연은 진우를 흔들어 깨웠다. 다행히 진우는 금방 눈을 뜨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계를 확인한 진우는 깜짝 놀라며,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편한 티셔츠를 벗고 아까 입고 왔던 셔츠를 입고, 반지 박스를 챙겼다. 그리고 결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으니 ‘클래식 이즈 베스트’ 방법을 실행하기로. 


영롱한 민트색 반지 박스를 챙기고 현관으로 향하자, 미연이 배웅을 위해 따라 나왔다. 포옹을 해주려는 미연을 막아서고, 진우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박스를 조심스럽게 열어 반지를 꺼내 미연의 손에 끼워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그토록 원하던 낭만적인 프러포즈는 아니지만, 

그래서 실망했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랑 결혼해 줄래?

난 이제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 

너랑 모든 순간을 함께 하고 싶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 또 아이를 낳을 때까지. 

모든 순간을 그 누구도 아닌 너와 함께. 그게 내 소원이야. 

내 소원 좀 들어주지 않을래?
 
 미연은 대답대신 진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현관의 센서등은 

장장 10분 동안 계속해서 불이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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