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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Jul 17. 2022

#4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데리러 올 당신에게.


#4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데리러 올 당신에게. (소설)


그 해 겨울을 좀처럼 잊을 수가 없어요.


끝도 없이 밀려드는 업무로 매일 밤 위경련에 시달리던 나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심한 스트레스로 우울감에 사로잡힌 나를,

당신은 한참 동안 잠자코 바라만 보고 있었어요.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찌할 바 모르고 한숨만 쉬고 있던 내 손을 덥석 잡았던 당신.


당신은 말했어요. 모두 던지고 떠나자고요.

우리 형편에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된다며 울상 짓는 나를

방으로 이끌어 짐을 챙기게 했죠.


어안이 벙벙해 제대로 짐도 챙기지 못하고 허둥대던 나를

의자에 앉히고 당신은 나의 속옷부터 잠옷 그리고 외투까지 챙겨주었죠.


꼼꼼한 당신은 내가 즐겨 쓰는 클렌징 티슈까지 

여행 가방 앞 포켓에 넣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차 키까지 챙기고, 

책상을 지배하던 서류 더미를

피아노 위를 덮고 있던 흰 천으로 덮어버린 뒤,

당신은 내 손을 잡고 현관문을 벌컥 열었습니다.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는 길,

나는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정말 이대로 회사를 그만두어도 되는 것이냐고.

지금 이렇게 일을 멈춰버리면 일상을 던져버린다면

앞으로 나의 통장에 일정한 금액이 더는 찍히지 않을 것이라고. 

그럼 도대체 무얼 먹고 사느냐고. 
 

전세 대출금은? 차 할부금은? 

아파트 관리비는? 핸드폰 요금은?

누가 해결할 것이냐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나의 질문에 당신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주차장에 도착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랐고

당신은 차를 몰아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당신은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당신의 차가 멈춘 곳은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이었습니다.

드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열어 

커다란 여행 가방을 꺼내고 당신은 말없이 내 손을 잡았습니다.

당신이 내 손을 잡고 향한 곳은 터미널 안의 대합실.


슬며시 밀려오는 한기에 내가 몸을 웅크리자, 

당신은 두꺼운 패딩을 내게 걸쳐주고 

매표소로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니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매표소 직원과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아마도 미리 예약을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후쿠오카로 떠날 배편을 구하는 상황이라

무언가 여의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20분이 흘렀을까요?

옆에 놓인 여행 가방의 지퍼 끝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나를

당신은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울리는 곳을 따라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니

당신은 후쿠오카로 가는 배 티켓을 손에 쥐고 환하게 웃고 있었죠. 
 오랜만이었습니다. 아니, 결혼한 이후로 처음이었어요. 

당신이 그렇게 이를 다 드러내면서까지 아이처럼 밝게 웃은 것은. 


당신이 어렵게 구한 그 표를 손에 쥐고, 

우린 그렇게 후쿠오카행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소요시간은 3시간 30분.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

물길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도착한 후쿠오카는

이상할 만큼 한국보다 훨씬 더 추웠습니다. 


뼈까지 파고드는 추위에 또다시 몸을 떨자,

당신은 수많은 인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거리 한복판에서 여행 가방을 열어 

기어코 구석에 박혀있던 털모자를 찾아냈습니다. 
 
흐트러진 털모자의 모양을 바로잡아 

당신은 내 머리에 씌어주었죠. 다정하게 눈을 맞춰주면서.

당신의 그토록 다정한 눈빛, 참 오랜만이었어요. 
 아니, 어쩌면 당신은 늘 옆을 지키며 그런 눈빛으로 날 바라봤는데 

스트레스에 휩싸인 난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겠죠. 
 혹은 당신의 눈빛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거나.


우린 서로의 손을 통해 온기를 나누며 

걷고 또 걸어 길가의 작은 선술집에 들어갔어요. 


백발이 성성한, 80대로 보이는 어떤 할머니께서 운영하시는,

이제는 일본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는 그런 곳. 


두꺼운 외투를 벗어 할머니께서 건네주신 옷걸이에 걸어두고

우린 주인 할머니께서 연신 손가락질을 하며 추천해 주신

고등어구이와 생맥주를 주문했습니다. 
 
할머니께서 좁은 가게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시며

조리하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당신은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건넸습니다. 
 

통장이었습니다. 

S은행의 통장이었죠.


결혼과 동시에 당신은 모든 경제권을 내게 넘겨주며 

통장이며 각종 서류들을 내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건넨 통장은

눈에 익숙지 않은, 아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황급히 통장에서 당신의 얼굴로 시선을 옮긴 내게 

당신은 말했습니다. 


“놀란 토끼 눈 하지 말고, 일단 통장 한 번 열어볼래?”


떨리는 손으로 통장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차례차례 넘겨 모인 금액을 확인했습니다. 

하마터면 난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간신히 터져 나오는 탄성을 목으로 꿀꺽 삼켰습니다. 


통장에는 8천5백만 원이 들어있었습니다. 
 남편은 늘 내게 월급을 모두 주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큰돈을 모을 수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놀라 하염없이 통장만 바라보고 있는 내게 

당신은 상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마케터였던 당신은 회사를 다니면서 

틈틈이 지인으로부터 외주 작업을 받아왔다고 했습니다.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번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통장에 모아두었으며 외주 작업이 뜸할 때면 

내게는 산책을 간다고 둘러대고 

결혼 초에 샀던 자전거를 타고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3년 동안 부지런히 모은 돈이 8천5백만 원이었다고 합니다. 
 

목표는 1억. 1억이 모두 모이면 내게 주려고 했답니다. 

1억을 모두 현금으로 뽑아, 내게 선물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걸로 무엇이든 하라고. 일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도 좋고, 

예전부터 갖고 싶어 했던 명품 백을 사도 좋고, 

오래되어 잔고장이 많은 차를 바꿔도 괜찮다고.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다 해도 된다고 말해주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내가 너무 힘들어했고

이젠 건강까지 서서히 망가져 가는 모습을 

남편으로서, 평생의 반려자로서,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미처 1억을 다 모으지는 못했지만 

이 돈이라도 내게 건네주며 

그토록 하기 싫고, 괴로운 일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남편의 고백에, 나는 바로 옆자리에 손님이 앉아있음에도 

눈물이 터져버렸습니다. 
 
 그동안의 버텨온 시간에 대한 서러움, 그리고 남편에 대한 고마움으로 

도무지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어느 한국인 여자의 울음소리에 

일순간 선술집은 조용해졌습니다. 모두들 우리 부부 쪽을 빤히 쳐다봤죠. 
 그런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은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나를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당겨 따뜻하게 안아주었습니다. 
 
 울음소리가 옅어질 무렵, 

당신은 내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습니다. 
 
 “민영아, 사랑한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제는 너 하고 싶은 거 해.

철저하게 네 생각만 해.“ 


나는 그런 당신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술을 포개었습니다. 
 

주문한 메뉴를 내어주시려던 주인 할머니는

우릴 보고 슬며시 웃으시며 음식을 다시 들고 되돌아가셨죠. 
 
이후, 우린 서울로 돌아왔고 

저는 회사를 그만두고 예전부터 꿈꾸어 왔던 일을 시작했어요. 
 20대 초반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하는 일을 

사랑했던 저는 죽기 전에 꼭 한 번 책방을 운영해 보고 싶었죠. 
 
당신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서울 변두리 동네 작은 상가를 얻어 책방을 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외진 곳에 있어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고, 수익도 형편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저녁 7시 책방 문을 열고 

나의 퇴근을 도우러 오는 당신을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데리러 올 당신에게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을 만나,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있어 영광이라고. 
당신은 내 삶을 통틀어 가장 큰 선물이라고. 
나도 당신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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