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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Jun 29. 2022

#3 우리 하카타 역에서 다시 만나요


#3 우리 하카타 역에서 다시 만나요


주인공 : 민하 


출근한 지 10분쯤 되었을 때였다. 인사팀 부장이 민하의 자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의 용건은 간단했다. 지금 바로 인사팀 전용 회의실로 오라는 것.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거울을 꺼내들고 아이라인이 번지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툭하면 번지는 아이라인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민하였다. 흐트러진 셔츠까지 잘 정돈한 후,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깐깐한 인상의 인사팀 부장이 긴 테이블 끝에 앉아있었다. 도대체 왜 저럴까 싶을 정도로 늘 예민하고 분노하기 바빴던 부장의 표정이 오늘은 어쩐지 사뭇 달랐다. 뭐랄까 미안한 표정이랄까, 곤란한 표정이랄까? 


대학교 졸업 후, 곧바로 입사해 5년 동안 회사에 몸담으면서 부장의 그런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아무리 애써 떠올리려고 해봐도 전무했다. 그런 부장이 지금 민하의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 필시 무슨 일이 있어서였다. 어쩐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민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한참의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부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부장이 애꿎은 손가락을 연신 만지작거리며 민하에게 꺼낸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 회사에 민하의 자리가 더이상 없다는 것. 이번달 내로 정리해서 나가달라는 것. 위로금을 넉넉히 줄 테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라는 것. 그렇다. 냉철하던 부장이 한껏 긴장하며 민하에게 건넨 것은 바로 해고 통보였다. 승진이 아닌 '해고'.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직장인이 가장 듣기 꺼려하는, 두려워 하는 단어인 '해고' 말이다. 


해고 이유는 단순했다. 더 이상 민하가 담당하고 있는 업무가 회사에 필요하지 않다는 것. 민하는 사내 방송을 제작하던 PD였다. 직원들을 위한 복지 혜택부터, 회사의 주요한 이슈까지 영상을 만드는 사람. 직원들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예산 문제로 사내 방송국을 전면 폐지하기로 했단다. 방송으로 전하던 이슈는 앞으로 사내 게시판 공지사항으로 간단히 전달하겠단다. 너무도 명확한 이유에 민하는 아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내심 다른 부서로 옮겨주었으면 했지만, 부장은 단호했다. 이번 달 내로 자리를 비워달라고 했다. 사내 방송 자체가 폐지되니 인수인계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내일도 회사를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민하는 부장의 퇴사 퇴사 통보를 거절할 수 없었고, 6개월 치 월급을 위로금으로 받기로 확정 짓고 회의실을 나왔다. 


남은 기간은 딱 열흘이었다. 일방적 퇴사 통보 이후, 민하는 회사에 나가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지만 이를 악물고 자리를 지켰다. 괜히 오기가 생겨 짐도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챙기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 민하는 새벽 5시부터 일어나 공들여 화장을 했다. 작년 연말, 거금의 보너스를 받아 구입한 구찌 원피스도 꺼내 입었다. 늘 들고 다니던 에코백 대신 옷장 속에 고이 모셔두었던 디올의 레이디 백도 챙겼다. 5년간의 회사 생활의 마지막을 초라하게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한껏 명품으로 치장한다고 해서, 공허한 마음이 메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초라한 자신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하는 그렇게 했다. 온 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두르고 회사에 들어가니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적어도 동료들에게 내가 초라해 보이지는 않겠다는 그런 안도감 말이다. 


그렇게 민하는 당당하게 5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나왔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새벽부터 공들여 그린 아이라인이 번지는 것을 알면서도 엉엉 울었다. 기사님은 그런 민하를 위로해 주셨다. 청춘은 원래 힘든 것이라며, 이 또한 다 지나갈 것이라며. 집에 도착한 민하는 도저히 맨 정신에 잘 수 없으리라는 판단에 팬트리에 숨겨두었던 위스키를 꺼내 혼자 모두 마셨다. 그리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곧바로 소파 위에서 기절하고야 말았다. 


다음날 아침, 머리가 깨지는 듯한 고통에 눈을 떴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후 3시였다. 시간을 보자마자 갑자기 구토가 밀려왔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부여잡았다. 위액까지 모두 게워낸 후에야 정신이 돌아온 민하는 거실을 뒹굴던 위스키병과 안주들을 깔끔하게 치웠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유튜브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어떤 인플루언서의 브이로그를 보다가, 정치 현안을 알려주는 영상도 보다가, 우연히 여행 유튜버의 영상을 보게됐다. 35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그가 선택한 여행지는 일본 후쿠오카였다. 솔깃했다. 일단 맛집도 많아보였고, 민하가 살고 있는 부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다채로운 쇼핑 스팟도 마음에 쏙 들었다. 게다가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 쾌속선을 타고 3시간만 가면 도착할 수 있었다. 세상에 KTX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을 가는 것과 크게 시간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왕복 비용도 생각보다 저렴했다. 성수기가 아니라 그런지 더더욱. 


가격도 저렴하겠다, 백수라 시간도 많겠다, 민하 입장에서는 후쿠오카행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결국 민하는 고민 끝에 후쿠오카행 쾌속선을 예약했다. 내친김에 호텔과 일주일 간 후쿠오카 전역을 저렴한 가격에 돌아다닐 수 있는 패스까지 구입했다. 쾌속선의 출발 날짜는 바로 다음날 오후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민하는 아이패드에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적어보았다. 생각보다 꽤 많았다. 하지만 짐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았던 민하는 부족한 물건은 현지에서 조달하기로 하고 최대한 간단하게 짐을 꾸렸다. 로밍은 따로 하지 않기로 하고, 3일 동안 만 오천 원에 데이터를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포켓 와이파이만 여객 터미널에서 수령하는 것으로 신청해 두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민하는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집에서 30분 거리의 터미널로 이동했다. 도착하자마자 발권을 마치고, 업체로 가서 포켓와이파이를 수령하고, 허기를 달래고자 푸드코트에서 비빔밥을 먹었다. 파도가 세다는 이야기를 들어 혹시 몰라 멀미약도 미리 먹어두었다. 


성수기가 아니어서일까. 배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승선 인원이 다 합쳐도 30명이 채 안되어 보였다. 미리 저장해 둔 예능을 보며 시간을 보냈더니 금세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가깝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가까울 줄이야. 내리자마자 재빠르게 입국 심사를 끝내고 공항을 벗어났다. 공항 앞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쯤 달리니 유튜브 영상으로만 봤던, 인스타그램에서만 봤던 하카타역이 보였다. 


체감상 부산역보다 훨씬 커보였다. 대형 조형물이 앞을 지키고 있었고, 양옆으로는 쇼핑몰과 백화점이 버티고 서 있었다. 하카타역 앞 버스 정류장에 하차한 민하는 바로 맞은편의 호텔로 들어가 체크인을 마쳤다. 역시 일본호텔답게 아기자기 했다. 협소했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었다. 심지어 반신욕을 즐길 수 있는 욕조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곧바로 반신욕을 하고 싶었지만 밤이 저물어가고 있었기에 저녁을 먹으러 다시 밖으로 나왔다. 무계획으로 떠나온 여행이라 어디서 저녁을 먹을지 정해둔 것이 전혀 없었다. 


하카타역 인근 아케이드를 걸으며 괜찮아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한 바퀴를 모두 돌았는데도 끌리는 것이 없어 아예 역 안으로 들어갔다. 워낙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라 늦은 저녁에도 대부분의 식당이 성업 중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민하의 발길을 붙잡은 것은 바로 규동 정식이었다. 국과 콜라까지 나오는 데, 300엔이면 충분하단다. 게다가 풍겨오는 냄새도 민하의 선택을 부추겼다. 가격이 워낙 합리적이어서 그런지 가게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민하는 규동 맛에 심취해 있는 많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구석 자리로 들어갔다. 민하같은 혼밥족을 위한 1인용 테이블이었다. 'BEST'라고 써진 규동 세트를 고르고 기린 생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워낙 정식 가격이 저렴해서 생맥주가 더 비쌌다. 피식 웃으며 영수증을 확인한 민하 옆으로 누군가 큰 배낭을 내려놓으며 앉았다. 열다섯 명도 겨우 들어갈 작은 규모의 가게에 자신의 몸 만한 큰 가방을 들고온 남자가 신기해 민하는 실례를 무릅쓰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이제 막 주문을 마친 그가 말을 걸어왔다. 


"엇? 혹시 한국 사람이세요?"

"네! 오! 어떻게 아셨어요?"

"한국 사람들은 딱 티가 나거든요"

"아...!"


그렇게 반갑게 옆자리 남자와 인사를 나눈 민하였다. 이윽고 민하의 앞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규동 세트가 도착했다. 마치 크림처럼 쫀득쫀득한 맥주를 들이키며 규동을 먹는 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워낙 맛있어서 무아지경으로 먹고 난 뒤, 옆으로 보니 그 남자도 이제 막 식사를 마치고 함께 나온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민하.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남자는 씩 웃으며 일어서더니 민하의 음식값까지 대신 지불하는 것이 아닌가. 놀란 민하가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결제를 마치고 곧바로 나가는 남자의 손목을 다급하게 잡은 민하. 


"아니, 왜 제것까지 계산해 주시는 거죠? 제 건 제가 하면 되는데...!"

"그냥요. 반가워서요. 외국에서 한국 사람 만나면 괜히 반가운 거 있잖아요!"

"아니...그래도..."

"그럼 커피 사주세요. 전 후쿠오카에 세 달 정도 있을 예정이니까. 시간 맞춰서 한 번 더 봐요."

"네?"

"제 인스타 계정 알려드릴게요. DM 주세요!"


남자는 아까 규동집에서 받은 영수증 뒤에 자신의 인스타 계정을 써준 후, 홀연히 사라졌다. 민하가 붙잡을 새도 없이 빠르게. 당황한 민하는 그가 남긴 영수증을 가방에 집어 넣고 곧장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로 들어온 민하는 그의 인스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여행을 좋아하는 남자 같았다. 죄다 아까 본 그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는 사진뿐이었다. 유럽 일주도 한 것 같았고,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도 해본 듯했다. 외모도 준수했다. 성격도 쿨해 보였다. 깊게 대화를 나눠본 것이 아니니 정확히 파악할 길은 없었지만...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 민하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에게 DM을 보냈다. 


"아까 규동 집에서 만났던 사람입니다. 식사 대접해 주셔서 감사해요.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저도 보답을 하고 싶은데, 언제 시간이 되시나요? 저는 3일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거든요. 시간이 많지 않아서..."


"아! 일정이 짧으시네요. 저희 그럼 내일 만날까요? 오전이 좋으세요 오후가 좋으세요?"


"저는 오전이 좋습니다!"


"네. 그럼 우리 하카타역 앞에서 다시 만나요. 오전 10시 괜찮죠?. 내일 비 온다니까 우산 꼭 챙겨서 오세요. 혹시 우산 없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저 우산 큰 거 2개나 있거든요. 3일 밖에 안 계실 건데 우산 새거 살려면 돈 아깝잖아요. 짐이기도 하고...! 부담 없이 말씀해 주세요. 정말로."


역 안의 작은 규동 집에서 잠시 스쳤던 사람이지만, 상대방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밥값을 계산한 저돌적인 사람이었지만, 의외의 세심함과 다정함에 묘하게 마음이 설레는 민하였다. 어쩐지 지금 입고 있는 물 빠진 티셔츠와 바지는 벗어던지고 혹시 몰라 챙겨왔던 민트색 원피스로 갈아입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곧바로 캐리어를 열어 아무렇게나 접혀 있었던 원피스를 꺼내어 옷걸이에 걸어둔 민하는 얼굴에 팩을 붙이고 누웠다. 


그리고 다시 그와 나눈 대화를 살폈다. 민하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대화를 읽다가 이 문장에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우리 하카타역에서 다시 만나요"


다시? 그저 지난번에 이어 다시 만나자는 뜻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짐작하지 못하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일까? 왜 규동 값을 대신 계산해 주었냐는 민하의 말에 쓱 웃으며 답하던 그의 얼굴이 자꾸만 맴돌아 민하는 결국 새벽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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