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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Jun 28. 2022

#2 이 말을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요

- 한유정 스토리 컬렉션


#2 이 말을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요.


- 주인공 : 민영 / 용준


민영은 그토록 믿었던 남자친구에게 크게 배신을 당했다. 만난 지 4년하고 하루가 더 지난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민영은 남자친구의 차에 올랐다. 차에 타면서 지갑이 떨어져 주우려고 고개를 숙였는데, 검붉은 색의 집게핀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본능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집게핀을 주워든 민영. 혹시 자신의 것인가 싶어 두 눈을 크게 뜨고 확인하니, 이게 무슨 일일까. 집게핀에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JY'라고, 아주 선명하게.


민영은 직감했다.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다른 누군가가 생겼다는 것을. 곧장 남자친구에게 따져 묻고 싶었지만, 사실을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남자친구 몰래, 그 집게핀을 가방 속에 집어넣고 아무렇지 않은 듯 데이트에 임했다. 함께 명동으로 가서 미슐랭 가이드에 선정되었다는 맛집에 들러 저녁도 먹었다. 그런 다음 분위기 좋은 바로 이동해 달콤 씁쓸한 와인도 연거푸 마셨더랬다. 자정 무렵까지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마치고 그의 배웅을 받으며 집에 도착한 민영. 남자친구가 떠나간 문 앞에 주저앉아 가방 속 집게 핀을 바라보며 엉엉 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었다. 사실을 확인할 자신이 말이다. 


그렇게 눈물범벅인 채로 새벽을 맞이한 민영. 떨리는 손으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후, 졸려죽겠다는 목소리의 그가 전화를 받았다. 


남자친구 : (목이 거의 잠긴 채로) 어어 ~ 민영아, 무슨 일 있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민영 : (한참을 망설이다가) 오빠...

남자친구: (놀라며) 무슨 일이야? 뭐, 도둑이라도 들었어? 뭐야? 무슨 일인데? 내가 지금 집으로 갈까?

민영 : 내가 오늘 저녁에 오빠 차에서 검붉은 집게핀을 주웠는데... 혹시...


'집게핀'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걱정된다며 곧 집으로 달려오겠다던 남자친구가 조용해졌다. 거친 숨소리만 들려올 뿐,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지속됐다. 기나긴 침묵을 깬 것은 의외로 남자친구였다. 


남자친구 : 민영아, 사실 나 다른 사람이 생겼어. 속이려고 그런 건 아닌데, 그건 정말 아닌데... 네게 말을 할 타이밍을 놓쳐버렸어. 미안하다, 미안해. 정말. 


어느 순간부터, 우리 관계가 혼란스러웠어. 나는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인데, 가정을 이루는 것이 승진보다 더 좋은 사람인데, 근데 넌 결혼 이야기만 꺼내면 늘 피했어. 마치 나와 결혼을 하지 않고 싶다는 사람처럼 말이야. 비겁한 변명이겠지만, 그래서 마음이 좀 흔들렸어. 그러다 이 여자를 만나게 됐어. 딱 두 번 만났는데, 정말 아무 일도 없이 두 번 만나서 커피만 마셨는데 너무 좋더라. 대화도 잘 통하고, 가치관도 비슷했어. 결

혼을 빨리해서 가정을 이뤄 아이를 키우면서 사는 것이 꿈인 사람이었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자꾸 내가 연락을 하게 되고, 만나자고 조르게 되더라. 물론, 그 여자는 내가 여자친구가 있다는 건 모르고. 알면 날 만나지도 않았을 테고. 내 마음에 확신이 생기면 네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 시기가 이렇게 빨리 올지는 몰랐네. 


바람피운 남친의 전형적 변명이었지만, 너무나 그럴듯한 말솜씨에 민영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었던 존재였기에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놀랍고 황당하고 어찌해야 할 줄을 몰랐을 뿐. 계속해서 사죄의 뜻을 밝히는 남자친구에게 민영은 딱 한 마디를 남겼다. 


"그래, 잘 지내"라고.


4년을 만난, 오직 자신만을 바라본 여자친구를 버린 나쁜 놈이었지만, 그냥 그렇게 떠나보내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집을 둘러보니 남자친구의 흔적이 너무 많았다. 그가 쓰던 칫솔, 베게, 충전기, 면도기, 숟가락, 젓가락, 그릇까지. 그의 흔적들로 가득찬 집. 민영은 이사 올 때 미리 사두었던 100L짜리 쓰레기 봉투에 그의 잔재를 모두 쓸어 넣었다. 함께 찍은 사진과 그가 써준 엽서와 편지까지 모조리 남김없이.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쓰레기 봉투의 매듭을 짓고 집 앞에 버리고야 말았다. 


죽어서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나쁜 놈이지만, 빈자리가 컸다. 갑작스러운 이별과 경악스러운 배신. 분노가 휘몰아쳐야 정상이지만, 어쩐지 공허함만 가득 남았다. 억지로라도 잠을 자야했다. 눈알이 빠져버릴 만큼 두통이 심했다. 불면증이 심했던 시절, 친구가 건네주었던 수면유도제를 한 알 먹었다. 하지만, 어쩐지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분명 바람까지 피운 나쁜 사람인데, 자꾸만 그와 좋았던 순간들만 민영이 바라고 보고 있는 천장에 한 편의 영화처럼 그려졌다. 죽을 맛이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마침 다음 날은 공휴일이었다. 출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도 되는 날. 민영은 수 년간 옷장에 묵혀두었던 커다란 백팩을 하나 꺼냈다. 뽀얗게 쌓인 먼지를 훌훌 털고, 수건부터 양말 속옷, 세면도구까지 챙겨 넣고 집을 나섰다. 그의 흔적은 없앴지만 아직 집을 떠나지 못한 그의 냄새와 온기에 집에 있는 것이 고역이었으니까. 게다가 아무리 노력해도 잠을 청할 수 없었으니까. 


모자를 푹 눌러쓰고 대로변으로 나간 민영. 택시를 잡아타고 고속터미널로 가줄 것을 부탁했다. 20분쯤 달렸을까. 고속터미널이 보였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간 민영. 초점 없는 눈으로 매표소를 바라보다가, 직원에게 부산으로 가는 표를 달라고 부탁했다. 카드를 내밀자,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속전 속결로 결제를 끝내고 표를 건넸다. 표를 받은 민영은 터덜터덜 승차 홈으로 걸어가 부산 노포동 터미널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드디어 버스에서 내려 부산땅을 밟게 되었다. 


내려오는 내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던 민영. 바깥바람을 맞으니 갑자기 갈증이 밀려왔다. 허름해 보이는 터미널 매점으로 뛰다시피 걸어가 생수 한 병을 샀다. 뚜껑을 열고 허겁지겁 물을 들이켰다. 갈증을 달래고 화장실까지 다녀온 후, 해운대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이동하던 그녀를 누군가 불러 세웠다. 


"야! 민영아! 네가 여기 왠일이야?"


민영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네이비 색 모자를 쓰고, 동그란 안경을 낀 어떤 남자가 민영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민영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 꿈만 같았다. 그렇다. 민영이 꿈에서만 그려왔던 그는 민영이 대학교를 중퇴하고 고민하던 시절, 그녀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동네 오빠였다.


부모님마저 갑작스럽게 적성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대학교를 중퇴한 자신을 비난하던 시절, 유일하게 '잘했다'라고 말해줬던 사람. 밥도 제대로 못 먹던 민영을 데려다 따뜻한 해장국 한 그릇을 사주던 다정한 사람. 늘 변함없는 친절에 감동받은 민영. 점점 감사한 마음은 호감으로 변해갔고, 큰 용기를 내어 '좋아한다' 고백까지 했지만 정말 미안하지만 만나는 사람이 있어 네 귀한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얼마 뒤, 민영은 취업을 하게 되었고, 남자친구와 뜨거운 연애를 시작하며 머릿속에서 그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런 그를  고향인 대구도 아닌 '부산'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그것도 터미널 한복판에서. 깜짝 놀란 민영. 놀란 것은 5년 만에 민영을 다시 만난 용준도 마찬가지였다.


용준은 2년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회사를 부산으로 옮겼다. 연봉도 세고, 복지도 꽤나 좋아 아주 만족해하며 이직을 했었더랬다. 2년을 오로지 일에만 매몰되어 살던 용준, 집에 좀 들르라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휴가를 내고 5일간 대구에 갔다가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차를 주차해둔 곳으로 걸어가다 민영을 발견한 것이었다. 


긴 머리에 화장기 하나 없던, 수수한 옷차림을 즐기던 민영이었지만 오랜만에 본 그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용준은 알아볼 수 있었다. 진한 화장을 했지만, 머리도 어깨에 겨우 닿을 만큼 짧아졌지만, 그녀의 눈만큼은 그대로였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단숨에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녀의 눈, 그 눈만 본다면. 


용준은 민영에게 물었다. 부산에는 어쩐 일이냐고. 민영은 간단하게 답했다. 

"오빠, 저 속상한 일이 있어서 부산에 여행 왔어요. 혼자."


민영의 옷차림은 과연 그러했다. 민영의 몸 만한 커다란 백팩이 그 증거였다. 속상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민영의 안색은 파리했다. 용준은 그런 그녀에게 제안했다. 함께 점심을 먹지 않겠냐고. 


분명 부산으로 오는 버스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입맛이 없었던 민영이었다.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쩐지 용준과 함께라면, 점심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좋은 예감이 들었다. 용준의 대답에 냉큼 "네, 좋아요"라고 대답하고 그와 함께 해운대가 한 눈에 보이는 식당으로 갔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를 따라간 식당의 메인 메뉴는 '대구탕'이었다. 고향 대구에서는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던 맑은 대구탕이었다. 끌리지 않는 비주얼이었지만, 용준의 권유에 국물 한 입을 떠서 입에 넣었다. 역시나, 맛이 없었다. 비릿한 맛이 비어있는 위를 자극하기까지 했다. 속이 불편한 민영은 결국 절반 이상을 남겼다. 


이를 본 용준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언젠가 직장 동료가 자신에게 추천해 줬던 맛집이라 데려온 곳인데, 민영은 국물 몇 입을 맛볼 뿐 통통한 대구살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니까. 괜히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점심은 실패했지만, 맛있는 커피와 디저트라도 사주고 싶어 근처 스타벅스로 갔다. 스타벅스에 들어간 민영의 눈이 반짝였다. 치즈 케이크부터, 샌드위치까지. 이걸 다 먹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디저트를 고른 민영. 가방 속 지갑을 꺼내어 결제를 하려는 민영을 제지하고 용준은 자신의 카드를 파트너에게 내밀었다. 


민영 :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오빠, 밥도 샀잖아요? 커피랑 디저트는 제가 할게요! 

용준 : (단호한 표정으로) 에이, 부산까지 왔는데 오빠가 살게. 오늘은 풀코스로 모십니다요~


민영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친절한 용준이 좋았다. 분명 부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심란하고 괴로웠는데 용준과 함께 있는 시간 동안은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즐거웠다. 물론 그가 자신 있게 추천하며 사주었던 대구탕은 별로였지만. 민영은 다정한 용준과 한참 동안이나 수다를 떨었다. 


두 사람이 보지 못했던 기간 동안 있었던 이야기부터, 찢어 죽여도 모자랄 나쁜 남자친구의 만행까지 모두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그렇게 네 시간이 흘렀다. 부모님을 포함하고도 이성과 그렇게 오랜 시간을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다. 민영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자, 센스 있는 용준은 터미널까지 다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계속되는 용준의 호의에 민영은 이상하게 마음이 설렜다. 고마움과는 확실히 다른 감정이었다. 


터미널로 향하는 길, 민영은 운전에 집중한 용준에게 물었다.


민영 : 오빠, 저 다음주에 부산 또 놀러와도 될까요?

용준 : 그래! 다음주 언제?

민영 : 금요일 어때요? 연차 내고 부산 올게요!

용준 : 금요일 오전엔 안 되고, 오후에는 괜찮아. 그때 올래 그럼?

민영 : 네 좋아요! 어디서 볼까요?

용준 : 몇 시에 오는지 알려주면 내가 터미널로 데리러 갈게. 


그렇게 민영은 한 달 동안 매주 부산으로 떠났다. 연차를 내지 못한 주에는 토요일에 부산행 시외 버스에 몸을 실었다. 노포동 터미널에 내리면 늘 용준이 반갑게 그녀를 맞이해 주었다. 용준의 미소가, 따뜻함이 공허했던 민영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부산으로 놀러온 민영을 용준이 터미널로 데려다주던 날이었다. 광안리 해변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터미널까지 가는 30분의 시간 동안 민영은 계속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용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 한참을 망설이다가 민영은 겨우 입을 뗐다. 


오빠, 제가 지금 이 말을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요.

거절당해도 좋으니, 저 후회 없이 말해보려고요.

저 오빠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더 멋질 때, 저랑 만나보지 않을래요?


터미널로 가던 길, 한참을 입을 열지 않던 민영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용준은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앞에 차와 박을 뻔했을 정도로. 얼마나 놀랐는지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놀람과 동시에 밀려온 감정은 안도였다. 사실 용준도 마찬가지였다. 매주 자신을 보러 부산에 오는 민영을 보며 가슴이 뛰었다. 올 때마다 점점 더 표정이 밝아지는 그녀가, 작고 도톰한 입술로 자신이 사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그녀가, 자신이 좋아하는 책에 대해서 신나게 설명하는 그녀가 자꾸만 마음속으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일을 할 때도, 운전을 할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심지어 세수를 할 때조차도 그녀가 아른거렸다. 


하지만 망설여졌다. 그녀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지 않으면 어떡하지.

섣불리 사귀자고 제안했다가, 친한 동생으로서의 민영도 잃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그런 생각과 걱정이 계속하여 용준의 머릿속을 맴돌았으니까.


이런 용준에게 날아든 민영의 고백.

용준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운전대를 놓쳐버릴 정도로 놀랐지만,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 

용준은 조수석에 타고 있던 민영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젠 오빠가 너 보러 대구로 갈게.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그 후도 계속 변함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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