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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Sep 16. 2022

어느 직장인의 스트레스 해소법

- 퇴근길, 교보문고에 들러 책을 삽니다.

퇴근 후,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교보문고로 가는 일은 나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아무리 먹어도, 미친 듯이 자도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는 교보문고에 가서 책들의 냄새를 맡고, 질감을 몸소 느끼며, 책 속의 활자를 눈에 고스란히 담아야 사라졌다.

회사에서 신논현역에 위치한 그곳까지 가는 일은, 꽤나 번거로웠다. 버스를 타고, 역 근처에 내려서 다시 지하철로 갈아타야 했다. 회사에서 집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다시 버스에 오르고 지하철을 타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했으나, 그래도 내재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런 번거로움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올라가면 교보문고의 입구가 보였다. 돌아가는 회전문 앞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한 발을 내딛는다. 한 발짝 들어가자마자, 풍겨오는 특유의 냄새. 교보문고의 시그니처 향이다. 가벼운 것 같기도, 어딘가 묵직한 것도 같은 이 향은 책을 만나러 가는 나의 설렘을 배가시킨다. 사방에서 풍겨오는 향을 즐기며, 가장 먼저 소설책이 진열된 매대로 가본다. 과하게 자극적이거나 혹은 함축적인 제목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대게 이런 책들은 조금만 펼쳐 읽어보면 내 가방에 담아 갈 수 없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살포시 이 책들을 놓아두고 세계 문학 매대로 발걸음을 옮긴다. 질투가 날 정도로 많은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 이곳. 민음사, 문학동네의 세계문학 시리즈부터 펭귄클래식까지. 모두 훔쳐 달아나고 싶을 정도로 대단한 책들이 책장을 빛내고 있다. 아직 읽어본 책보다 읽어보지 못한 책들이 훨씬 많아 이곳에만 서면 조바심이 난다. 이렇게 많은 책들을 내가 다 읽어보고 죽을 수는 있을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선고받은 존재이기에, 살 날이 무한하지 않기에, 늘 시간에 쫓기는데 이 짧은 생에 동안 눈앞에 높인 수많은 명작들을 읽어보고 눈을 감을 수 있을지 늘 불안한 마음이 든다. 


또다시 도지는 조급증을 억누르고 에세이 매대로 발을 돌린다. 유난히 신간이 많은 코너. 톡톡 튀는 표지들이 구매 욕구를 높인다. 표지만 보고 단숨에 구매하고 싶은 에세이도 있다. 그러나 성급한 결정으로 이미 내 원룸을 지배하고 있는 책들이 상당하기에 잃어버린 이성을 되찾고 내용을 훑어본다. 화려한 표지와 달리 내용은 어딘가 텅 빈듯한 책들도 더러 있어 손길을 거둔다. 


제목도 내용도 모두 마음에 드는 에세이가 있으면 냉큼 골라들고 역사책 매대를 향해 걸어간다. 요즘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푹 빠져 있다. 중학교 3학년 이후로 연예인 덕질도 멈춘 내가, 이순신 장군 책이란 책은 모두 다 사들이며 그의 삶에 푹 빠져 있다. 한산의 경우, 영화관에서만 2번을 관람했고 개봉 직전 김동하 소설가가 쓴「한산:태동하는 반격」을 3번이나 읽었다. 그의 소설과 김한민 감독의 한산을 비교하며 보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 이후, 나는 예전에 구매해 두었던 황현필 작가의 「이순신의 바다(그 바다는 무엇을 삼켰나)」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읽으며 더욱더 충무공의 세계와 그가 누빈 전장에 빠져들었다. 


소설부터 에세이 역사 매대까지 모두 훑고 나면, 지하의 핫트랙스 매장으로 넘어간다. 책을 열망하는 것만큼이나 문구류 소유욕 역시 엄청난 나는 핫트랙스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미 양손 무겁게 책을 들고 있는 상황이지만, 새로운 아이템은 없는지 살피며 쇼핑을 즐긴다. 그리고 자주 잃어버려도 귀신같이 내 품으로 돌아오는 검붉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어 결제를 마친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서걱거리는 종이봉투 안을 차지하고 있는 책에 자꾸만 시선을 빼앗긴다.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 애가 탄다. 저녁도 먹지 않은 터라, 집에 도착하면 응당 밥부터 먹어야 하지만 난 책을 펼친다. 가장 궁금했던 책의 1/3을 읽고서야 쌀을 씻고 반찬거리를 냉장고에서 꺼내온다. 


책을 읽는 일은 언제나 질리지 않는다. 눈이 뻑뻑해지고, 구부러진 목이 위험 신호를 보내와도, 언제나 짜릿하다.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현실의 나를 잊는다. 다가올 미래를 위해 얼마나 돈을 모아야 하고, 사회적 성공을 위해 어떻게 전략을 구성해야 하는지 따위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오로지 모든 신경을 쏟아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을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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