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엄청난 상실감과 공허함으로 인해 두통까지 몰려오던 시기가 있었다. 수액을 맞고, 하루종일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도 사라지지 않던 두통이 만년필에 온 신경을 쏟게 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일주일 만에 3개의 만년필을 품안에 들였다. 몽블랑, 펠리칸 등 고가의 만년필도 나를 유혹했지만, 입문자가 어디 그런 고가의 만년필을 활용이나 잘할 수 있을까 싶어 저가형 만년필 위주로 구매했다.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라미 사파리에 이어 라미스튜디오, 파이롯트 프레라와 카쿠노까지. 특히 파이롯트 카쿠노는 일본의 소학교(초등학교) 학생들이 쓰는 제품으로 가격이 만 원 초반대였다. 쿠팡에서 구입하니 카트리지까지 포함해서 만 이천 원 정도에 구입할 수 있었다. 워낙 가격이 저렴해서 사실 필기감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게 웬걸. 저렴한 만년필 특유의 종이 긁힘 현상도 전혀 없다.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글이 써진다. 또 립감도 상당했다. 개인적으로는 3만 원 초·중반대의 라미 사파리보다 파이롯트 카쿠노 제품이 훨씬 더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닙에는 귀여운 표정까지 새겨져 있었다. 과연 아이들이 딱 좋아할 만한 제품답다.
현재 소유하고 있는 만년필 중 가장 만족스러운 제품은 단연 '라미 스튜디오'다. 각인까지 해서 구입한 것으로 영롱한 바디 색깔이 자꾸만 손이 가게 한다. 필기감도 두말할 것 없다. 물 흐르듯 잘 써지고, 날카롭게 긁히는 느낌도 전혀 없다. 그립감도 좋다. 자꾸만 쥐고 무엇이라도 쓰고 싶어진다. 그러나 단 하나의 단점이 있다. 무게가 꽤나 무겁다. 오래 사용하면 손가락이 피로하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을 상쇄할 만한 장점이 워낙 많기 때문에 매일 들고 다니며 애용 중이다.
이제 막 발을 들인 만년필의 세계. 닙 종류도 다양하고, 만년필을 출시하는 회사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인터넷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가격이 저렴하지만 제품력이 좋은 중국 회사 제품들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또 상당한 고가임에도 몽블랑을 여러 자루 갖고 계시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몽블랑 제품은 가장 저렴한 모델도 50만 원 선이던데, 언젠가 나도 스스로에게 대견한 일이 있다고 내게 선물해 주려 한다.
만년필의 세계에 빠져든 이후로, 잡념이 사라져서 좋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아끼던 책의 구절들을 필사하며 마음을 다스린다. 만년필 특유의 소리를 들으면서, 또 가죽 필통 안에 나란히 누워있는 만년필의 자태를 유유히 감상하면서 말이다. 이제 곧 동생이 첫 월급을 탄 기념으로 선물해 준 세일러 만년필이 도착한다. 영롱한 보랏빛을 띄고 있는 제품인데, 필기감이 유난히 좋다고 하여 더욱 기대된다. (빨리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