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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Dec 11. 2022

#9 악성곱슬러의 슬픔을 당신은 아십니까?


<소설> 주인공 - 유희


이른 아침 일어나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물기를 가볍게 털어내고 집을 나서는 일.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칼의 물기를 앗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일. 모든 이에게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 유희에게만큼은 평생의 소원일 정도로 꿈같은 일이라면 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


유희의 아빠는 지독한 곱슬머리의 소유자였다. 그는 라면 면발처럼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감당할 수 없어 언제나 삭발 스타일을 고수하기로 유명했다. 친구들이 '반항아' 같다며 수군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군대에 다녀오고 복학을 해서야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간신히 삭발을 벗어난 이후로 그는 항상 미용실에서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매직 스트레이트의 힘을 빌려 머리카락을 곧게 폈다. 일말의 구불거림도 없이 완벽하게 펴진 머리카락을 장장 1시간을 들여 일일이 확인하고서야 그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미용실 원장에게 내밀었다. 

다달이 고가의 매직 시술을 받는 대신, 그는 함께 어울리던 또래들과 달리 술과 담배를 멀리했다. 유희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당신의 아버지로부터 한 달에 10만 원 남짓한 용돈을 받으면 그중에 5만 원은 머리에 투자해야했기 때문이다. 장난기 많은 동기는 머리에 무얼 그렇게 큰 돈을 투자하냐며, 차라리 술이나 마시러 가자며 유희의 아빠를 꼬셨지만, 그는 그저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못해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미용실의 문을 두드리던 그. 졸업을 하고 직장인이 되어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내다 보니 어느덧 삼십 대에 접어들게 됐다. '일'과 '집'밖에 모르던 집돌이였던 그를 위해 8촌 친척이 한 여자를 소개해 주었다. 부산 시내에 있는 4성급 호텔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난 두 사람. 매너 있는 남자로 보이고 싶었던 그는 약속 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상대 여성을 기다렸다. 


난생처음으로 해보는 맞선에 그의 입술은 바짝 말랐다. 타는듯한 갈증에 미리 주문한 커피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려 점원을 불렀다. 

"커피 한 잔 더 주문할 수 있을까요?"

커피를 부탁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곁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그는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뻔했다.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환하게 웃으며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는 심장 박동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커졌음을 확인했다. 혹시나 이 소리가 새어나가 그녀의 귀에 닿지는 않을 지 걱정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예뻤다. 회사에서 제일 아름답다며 남직원들이 격렬히 추앙하던 경리보다 훨씬 더. 게다가 그와 달리 구부러짐 없이 곧게 펴진 긴 머리칼도 마음에 쏙 들었다. 쑥스러웠지만 그는 용기를 내어 계속 만나보자고, 쭉 인연을 이어가보자고 청했다. 다행히 맞은편에 앉은 그녀도 싫지는 않았던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1년간 뜨거운 연애를 했다. 퇴근 후에는 꼭 그녀의 회사로 가서 기다렸다. 겨울에는 차를 예열해 놓고 그녀가 따뜻하게 집까지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의 따뜻한 면모에 그녀는 연애 1년 만에 결혼을 수락했고, 단숨에 상견례까지 마치고 부산에서 제일 비싼 결혼식장에서 모두의 축하 속에 꽃가루를 온몸으로 맞으며 힘차게 행진을 할 수 있었다.


결혼 6개월 만에 아이가 들어섰고, 10시간의 진통 끝에 유희는 부산에 있는 유명 대학병원 산부인과에서 우렁찬 울음을 터트리게 됐다. 갓 태어난 유희는 마치 서양 사람들처럼 머리카락이 구불구불했다고 한다. 모두들 양수에 머리카락이 불어 그런 것이라 생각했으나, 신생아실 전담 간호사들은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과연 하루에도 수십 명의 신생아를 상대하는 간호사들의 판단은 옳았다. 


자라면서 유희의 곱슬은 더 심해졌다. 그녀의 혹시나 딸이 또래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1달에 1~2번은 미용실로 데려가 매직 스트레이트를 시켜줬다. 아주 비싼 값을 지불하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전담 미용사가 아무리 팔이 뻐근할 정도로 매직을 해도 일주일이면 다 풀려 다시 곱슬머리가 되고야 말았다.  


결국 유희의 엄마는 동네에서 제일 큰 하이마트로 달려가 판 고데기를 구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거의 10만 원에 육박하는 값비싼 수입 제품이었지만, 그녀는 망설임 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덕분에 유희는 매일 아침 미용실에 간 것처럼 고급 시술을 엄마에게 받을 수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곱슬 머리 전용 샴푸로 손톱으로 두피까지 문질러 깨끗하게 감고, 머릿결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트리트먼트까지 듬뿍 발랐다. 


그런 다음 방바닥에 주저앉아 드라이기로 머리카락에 한 올의 물기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바짝 말렸다. 

'아니 이러다가 두피에 화상 입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아주 바짝 말이다.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고데기를 사용하게 될 경우, 수분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머리카락이 타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발이 갈라지고 툭툭 끊어진다. 조금만 건드려도 쉽게 부러지게 되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희는 긴 머리를 장장 30분에 걸쳐 머리카락을 말려야 했다.


이 대작업이 끝나고 나면 엄마에게로 달려가 최종적으로 모발에 수분기가 다 사라졌는지 검사를 받았다. 합격점을 받으면 엄마는 미리 예열을 시켜둔 고데기로 유희의 머리카락을 집게로 조금씩 집어가며 일일이 곧게 폈다. 엄마의 명품 시술이 끝나면 유희는 화장실로 곧장 달려가 헤어젤을 얇게 펴 발랐다. 엄마가 일일이 펴준 머리카락이 바람을 맞거나 습기를 만나 다시 구불구불해지지 않도록 말이다. 


일련의 과정을 마치고 시계를 보면 어느덧 1시간 30분이 지나있다. 머리카락을 손질하는 데 워낙 오랜 시간을 걸리는 탓에 유희는 매일 아침 빵 먹을 시간도 없어 우유로 허기를 달랬다.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매일 아침 1시간 반을 머리카락을 펴는 데 쏟으면서 말이다. 


누군가 그래도 탈모보다는 곱슬머리가 훨씬 낫다고 했으나, 유희에게는 머리가 구불거리는 것만큼 큰 고통이 없었다. 아무리 고데기를 열심히 하고 등교를 해도,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폭탄 머리가 되어버렸다. 친구들은 어김없이 놀려대기 시작했고, 유희는 가방 속에 비상용으로 챙겨둔 고무줄로 머리를 묶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면 엄마가 챙겨준 휴대용 고데기를 교복 주머니 속에 넣고 화장실로 달려가 급한 대로 수습했다. 


전국의 곱슬머리들이 모두 다 모여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될 만큼 수많은 회원을 자랑하는 커뮤니티에서 우연히 이런 글을 본적이 있었다.

"우리 딸 이야기임.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수시로 매직을 해야될 정도로 곱슬이 심했음. 근데 대학교 가더니 이제 1년에 1번 정도만 매직하면 될 정도로 곱슬기가 줄어들었음. 한참 사춘기 때, 곱슬머리가 절정에 이르고 그 시기가 지나면 좀 덜 한 것 같음. 그러니까 희망을 가져 다들."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내심 유희도 대학교만 가면 이 망할 곱슬머리에서 조금은 벗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대학교에 진학에서도, 졸업을 해서 취업을 했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유희는 아침마다 전쟁을 치러야 했고 한 달에 많게는 두 번, 적게는 한 번 이상 미용실에 들러야 했다. 


그 사이, 머리카락의 손상도는 절정에 이르러 가고 있었다. 이제는 손끝이 슬쩍 스치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끊어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지경에 도달했다. 하루에도 청소기를 3번이나 돌려야 할 정도로 말이다. 이젠 미용실에 가면 디자이너가 "고객님, 더 이상의 시술은 불가능해요. 설령 억지로 한다고 해도 이젠 일주일도 못 가서 다 풀려버리고 말 겁니다. 머리카락이 너무 손상돼서 시술 유지력이 많이 떨어졌거든요."라며 말리기 바빴다. 


결국 유희는 잠시 미용실 가는 일을 중단하기로 했다. 머리를 질끈 묶어 다녀보기로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장마철이 찾아왔다. 이른 새벽부터 머리를 묶어도 높은 슾도 탓에 애써 묶어놓은 머리카락들이 튀어나와 자신의 존재감을 강력하게 발산했다. 끈적한 젤을 얇게 펴 발라 고정력을 높여도 소용없었다. 젤을 바르고 20분이면 다시 머리카락들은 난잡하게 퍼져 유희를 괴롭게 했다. 


결국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여름날, 유희는 다시 미용실로 향했다. 그리고 디자이너의 만류에도 매직 시술을 강행했고, 이번에는 단발로 싹둑 잘라버렸다. 디자이너는 재차 우려를 표했다.


"고객님, 단발을 하시게 되면 머리가 더 붕붕 뜨게 될 겁니다. 감당 가능하시겠어요?"


유희도 이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나마 머리카락이라도 짧아야 머리 말리는 시간이 줄어들고, 고데기를 조금 더 편하게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미 어깨 어깨 아래의 머리카락들은 이미 완전히 상해서 특유의 찰랑임을 잃은 상태였으니 자르는 것이 훨씬 나았다. 


미용실을 들어갈 때와 달리, 어깨 선이 휑할 정도로 짧은 단발로 그곳을 나선 유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중요한 약속에 늦기라도 한 것인지 어떤 한 여자가 머리칼에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채로 지하철역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분명 바쁜 현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인데, 유희는 갑자기 25년 동안 억눌렀던 억울함, 슬픔이 밀려옴을 느꼈다.


누군가에게는 저렇게 당연한 일이 왜 유희에게만큼은 허락되지 않는 것인지. 이른 아침, 눈을 뜨고 세수를 하고 대충 머리를 감고 드라이기를 하지 않고 그냥 밖으로 나오는 일. 그저 수건으로 물기만 툭툭 털고 자연의 바람이 머리카락의 물기를 앗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일. 그리도 간단한 일을 왜 유희는 할 수 없는 것인지. 


억울함과 슬픔은 곧 분노로 변질됐다. 유희의 마음속에 커다란 불길이 일었다. 유희는 발걸음을 돌려 아까 들렀던 미용실로 다시 향했다. 


"어? 고객님? 다시 오셨네요? 혹시 뭐 두고 가셨어요?"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디자이너에게 유희는 말했다. 


"저 그냥 머리카락 죄다 밀어주세요."


"네? 고객님 갑자기 무슨...?"


"이해 못하시겠어요? 빡빡 밀어달라고요. 삭발해달라고요."


유희의 담당 디자이너는 그렇게 고데기 대신 바리캉을 손에 들었다. 


한움큼씩 사라지는 머리카락에도, 유희의 마음속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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