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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Dec 11. 2022

#10 하카타역에서 다시 만나자는 그에게


<소설> 주인공 : 민하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출근한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인사팀 부장이 느닷없이 민하의 자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의 용건은 간단했다. 지금 당장 5층에 있는 회의실로 오라는 것. 하던 업무를 중단하고서라도 최대한 빨리 오라며 힘주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다급함이 묻어났다. 


 최대한 빨리 가겠다고 대답을 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민하는 태연하게 가방에서 쿠션 팩트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빠른 손놀림으로 땀으로 인해 들뜬 화장을 고쳤다. 그리고 아이라인이 번지지 않았는지까지 세심하게 확인했다. 툭하면 번지는 아이라인 때문에 낭패를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터라, 민하는 중요한 자리에 갈 때면 바쁘더라도 꼭 눈가를 여러 차례 점검해왔다. 
 
 이제 회의실로 올라간 시간이다. 옷 매무새를 정돈하고, 민하는 조심스럽게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깐깐한 인상의 인사팀 부장이 긴 테이블 끝에 앉아있었다. 눈을 맞추지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부장은 언제나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민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부장의 표정이 오늘은 어쩐지 사뭇 달랐다. 뭐랄까 미안한 표정이랄까? 주름이 패인 미간에는 곤혹스러움마저 묻어나왔다. 
 
 5년 동안 회사에 몸담으면서 부장의 그런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아무리 애써 떠올리려고 해봐도 전무했다. 그는 언제나 당당했고, 날카로웠으며,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었다. 그랬던 부장이 지금 민하의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짓고 앉아있는 것은 필시 무슨 일이 있어서겠지. 불길한 예감에 민하는 마른 침만 연신 삼켰다. 
 
 정체 모를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숨이 막히는 분위기 속, 부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평소의 부장답지 않게 계속해서 부산하게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민하에게 꺼낸 이야기는 바로 ‘이것’. 해고 통보였다. 
 
 이 회사는 더 이상 민하가 필요하지 않단다. 이번 달까지 정리해서 나가달라는 것. 연봉의 절반을 위로금으로 넣어줄 테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라는 것. 그렇다. 시종일관 냉철하고 날카롭던 인사팀 부장이 한껏 뜸을 들이며 민하에게 건넨 것은 바로 해고 통보였다. 승진이 아닌 ‘해고’.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직장인이 가장 두려워 하는 바로 그 ‘해고’말이다. 


난데없이 충격적인 소식에 민하는 망부석이 되어버렸다. 오만가지 표정이 스쳐가는 민하의 얼굴을 보며 부장은 해고 사유에 대해 설명했다. 
 
 사유는 간단했다. 더 이상 민하가 담당하고 있는 업무가 회사에 필요하지 않다는 것. 사실 민하는 사내 방송을 제작하던 PD였다. 직원들을 위한 복지 혜택부터, 회사의 주요한 이슈를 영상으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산 문제로 사내 방송 송출을 전면 중단하기로 했단다. 방송으로 전하던 이슈는 앞으로 온라인 게시판 공지사항으로 간단히 전달하겠단다. 너무도 명확한 이유에 민하는 아무런 항변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민하 역시 회사 내에서 자신의 존재 여부에 늘 의문을 가져왔었다. 간단하게 메일이나 공지로 전해도 될 상황을 굳이 품을 들여 영상으로 만들 필요가 있나 여러 날 고민했었던 차였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과 누군가 현실을 짚어주는 것은 염연히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퇴사 통보라니. 
 
 침묵으로 일관하던 민하는 정신을 차리고 인사팀 부장에게 물었다. 
 
 “다른 부서로라도 옮겨주실 수는 없나요?”
 
 민하의 질문에 부장은 다른 부서는 이미 티오가 없어서 이동이 불가능하다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부장은 힘들겠지만, 이번 달 내로 자리를 비워달라고 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내일도 회사를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터라, "당장 내일부터 그만두겠습니다!"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남은 일자의 급여를 생각해 입을 꼭 다물었다. 결국 민하는 부장이 미리 기재해둔 사직원과 보상 조항에 대한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남은 기한은 딱 열흘이었다. 일방적 해고 통보 이후, 민하는 회사에 나가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다. 엄청난 상실감과 충격 그리고 스트레스 때문에 수시로 위경련이 찾아왔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다. 마냥 행복한 사람처럼 거짓된 표정을 꾸미고, 동료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냈다. 
 
 출근 마지막 날, 민하는 새벽 5시부터 일어나 공들여 화장을 했다. 작년 연말, 거금의 보너스를 받아 구입한 구찌 원피스도 꺼내 입었다. 분신처럼 늘 들고 다니던 에코백 대신 아낀다고 옷장 속에 고미 오셔두었던 디올의 레이디 백도 챙겼다. 장장 5년 간의 회사 생활의 마지막을 초라하게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한껏 명품으로 치장한다고 해서, 공허한 마음이 메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초라한 자신이 감춰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하는 온몸에 명품을 둘렀다. 목걸이와 귀걸이까지 명품으로 착장한 뒤, 회사에 들어가니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적어도 동료들에게 각인될 마지막 모습이 초라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안도감 말이다. 


동료들에게 스타벅스 돌체라떼까지 돌리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당당하게 회사를 나왔다. 건물 밖까지 배웅을 나온 후배가 잡아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새벽부터 공들여 그린 아이라인이 번지는 것을 알면서도 민하는 엉엉 울었다. 기사님은 그런 민하를 위해, 뒷자석 창문을 슬쩍 열어주셨다. 바람에 기대어 펑펑 울어도 된다는 일종의 배려를 해주신 셈이 아니었을까. 울음을 그치고 계산을 하려고 카드를 내밀었더니, 기사님은 택시비에서 2천 원을 깎아주셨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민하를 보며 택시 기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울지마. 이 또한 다 지나갈 것이여.”


태어나서 처음 만난 낯선 이에게 받아본 따뜻한 위로였다.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민하는 내려서 택시가 시야를 벗어날 때까지 한참을 바라봤다. 


집으로 돌아온 민하는 주방에 있는 큰 수납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오래 전, 친한 선배가 해외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며 면세점에서 사다 준 발렌타인 30년 산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고가의 술이라 아껴먹을 생각에 숨겨두었는데, 그걸 이렇게 마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잘 아껴두었다가, 언젠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함께 마시고 싶었던 그 위스키를 민하는 혼자 모조리 마셨다. 목구멍이 부어오르고, 위가 쓰리는 상황에서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연거푸 위스키를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그리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로, 여전히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은 채로, 소파 위에서 이불도 없이 기절하고야 말았다.
 
 다음날 아침, 머리가 깨지는 듯한 고통에 눈을 떴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후 3시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민하는 갑자기 밀려오는 구역감에 화장실로 달려갔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변기 앞에 앉아 민하는 어제 마신 위스키를 모두 게워냈다. 기어코 변기를 노르스름한 위액으로 물들인 후에 민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한바탕 토악질 후, 민하는 거실을 뒹굴던 위스키병과 안주들을 말끔히 치웠다. 거추장스러운 옷들을 벗어 잘 걸어둔 후, 침대에 누워 유튜브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평소 동경하던 어떤 인플루언서의 브이로그를 보다가, 정치 현안을 짚어주는 영상도 살피다가, 우연히 35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여행 유튜버의 영상을 접하게 됐다. 영상 속 유튜버가 고심 끝에 선택한 여행지는 바다 건너 일본의 ‘후쿠오카’였다. 꽤나 솔깃했다. 민하가 좋아하는 돈코츠 라멘의 본고장이 후쿠오카이기도 했고, 현재 살고 있는 부산에서도 크게 멀지 않았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로 가서 쾌속선을 타고 3시간만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세상에나, KTX를타고 부산에서 서울을 가는 것과 크게 시간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왕복 비용도 생각보다 저렴했다. 성수기가 아니라 그런지 더더욱 착한 가격에 홀린 듯이 예약과 결제까지 마쳐버렸다. 
 

퇴직금이랑 위로금도 넉넉히 들어올 예정이고, 백수라 시간도 많으니 민하 입장에서는 후쿠오카행을 결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친김에 호텔과 일주일 동안 버스나 열차를 이용해 후쿠오카 전역을 저렴한 가격에 돌아다닐 수 있는 패스까지 구입했다. 쾌속선의 출발 날짜는 바로 다음날 오후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민하는 테이블 위에서 먼지가 쌓인 채 나뒹굴던 아이패드를 급히 켰다. 메모장에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적어넣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여권 사본과, 멀미약, 속옥, 돼지코라고 불리는 저압 변환 어댑터까지 모두 썼다. 


이것저것 적다 보니, 챙겨갈 짐이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짐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던 민하는 부족한 물건은 현지에서 조달하기로 하고, 최대한 단출하게 짐을 꾸렸다. 로밍은 따로 하지 않기로 하고, 체류 기간 동안 만 오천 원에 와이파이를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포켓 와이파이만 여객 터미널에서 직접 수령하는 것으로 신청해 두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다음날 아침을 맞이한 민하. 빈 속에 배를 타면 멀미를 할 것 같아 누룽지를 끓여 속을 채웠다. 최종적으로 빠진 물건이 없는지 살피고, 민하는 택시를 타고 30분 거리의 터미널로 이동했다. 도착하자마자 발권을 마치고, 업체로 가서 포켓 와이파이를 수령하고, 카페로 가서 커피 한 잔을 구입했다. 안내방송에서 오늘 유난히 파고가 높다는 소리를 듣고선 멀미약도 미리 먹어두었다. 
 

성수기가 아니어서일까. 배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람이 없었다. 승선 인원을 모두 다 합쳐도 30명이 채 안 될 듯했다. 승선 인원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었다는 후기를 봐서 걱정이 앞섰는데, 예상 외의 고요함에 민하는 가뿐한 마음으로 배정된 자리에 앉았다. 미리 저장해 둔 예능을 두 편 보며 시간을 보냈더니, 금세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가깝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나 가까울 줄이야. 내리자마자 재빠르게 입국 심사를 끝내고 후쿠오카 여객 터미널을 벗어났다. 터미널 앞에서 100엔이면 어디든 내려주는 버스를 타고 30분쯤 한적한 일본의 고가도로를 달리니, 멀리서 하카타역이 보였다. 유튜브 영상으로만 봤던, 인스타그램으로만 봤던 바로 그 웅장한 하카타역 말이다.
 
 하카타역의 위용에 넋을 잃고 있던 민하의 귀에 안내방송이 흘러들었다.
 
 この駅は博多駅です。
 이번 역은 하카타역입니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사람들을 따라 하카타역 앞에 내린 민하. 잠시 가만히 서서 역을 살폈다. 기분 탓인가. 부산역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파도를 연상케 하는 커다란 조형물이 앞을 장식하고 있었고, 양옆으로는 한큐백화점과 각종 대형 쇼핑몰 체인이 버티고 서 있었다. 
 
민하는 하카타역 바로 맞은 편 호텔로 들어가 체크인을 마쳤다. 혹시 이것저것 물어보지는 않을까 염려했지만, 여권을 보여주고, 그들이 여권을 확인하는 동안 이름과 사인만 하면 되었다. 서비스 차원에서 준다는 500ml 생수를 받아들고 객실로 올라갔다. 일본의 비즈니스 호텔들은 워낙 협소하다고 하여 큰 기대가 없었던 민하였다. 그런데, 좁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있을 건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심지어 여유로이 반신욕을 즐길 수 있는 욕조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곧바로 욕조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밀려오는 허기를 외면할 수 없었던 민하는 짐을 대충 던져두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갑작스럽게 결정한 후쿠오카행이라, 민하는 어디서 저녁을 먹을지 정해두지 않았다. 
 
결국 민하는 하카타역 인근 아케이드를 걸으며, 가장 괜찮아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한 바퀴를 모두 돌았음에도 마땅히 끌리는 식당이 없어, 아예 역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워낙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라 늦은 저녁에도 대부분의 식당이 성업 중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민하의 발길을 붙잡은 곳은 규동 정식을 파는 곳이었다. 따뜻한 미소된장국과 일본 여성들에게 특히나 인기가 좋다는 메론 소다까지 나오는 데, 500엔이면 충분하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식당 안에서 풍겨오는 냄새도 민하의 선택을 부추겼다. 가격도 저렴하고, 세트 구성도 알차서 가게 안은 이미 정갈한 흰색 와이셔츠와 서류 가방을 든 일본의 직장인들로 북적였다.
 

민하는 규동 맛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구석 자리를 찾아갔다. 역시 일본이었다. 민하처럼 혼자 온 사람들을 위한 1인용 테이블이 잘 준비되어 있었다. ‘BEST’라고 써진 500엔짜리 규동 세트를 고르고 어눌한 일본말로 기린 생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워낙 정식 가격이 저렴해서 생맥주가 더 비쌌지만, 그래도 마셔보기로 했다. 후쿠오카에 와서 처음 하는 의미 있는 식사였으니까. 


 배고픔에 규동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민하 옆에 누군가 큰 배낭을 내려놓으며 앉았다. 자신의 몸 만한 배낭을 짊어지고 온 사람이 신기해 민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유창한 일본말로 주문을 마친 그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둘은 동시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깜짝 놀란 민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반면, 쾌활해 보이는 남자 쪽에서 먼저 말을 건네왔다. 
 
 “한국 사람 맞으시죠?”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한국 사람들은 한 눈에 티가 나거든요.”
 

“아…그런가요?”


그렇게 잠시 옆 자리 한국 남자와 대화를 주고 받은 민하의 앞으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규동 세트가 도착했다. 특별히 주문한 시원한 생맥주도 함께 말이다. 마치 크림처럼 쫀득쫀득한 맥주 거품을 먼저 맛보고, 남은 맥주를 한입에 털어 넣은 민하. 갈증을 달래고 나서, 본격적으로 규동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규동 한 숟가락에 일본식 단무지를 올려 먹고 또 먹었다. 땀까지 흘리며, 무아지경으로 먹고 난 뒤 옆을 보니 그 남자도 이제 막 식사를 마치고 함께 나온 메론소다를 마시고 있다.
 
 순간 그와 민하는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시선 처리를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살짝 웃으며 일어서더니 카운터로 갔다. 민하도 마침 계산을 해야 되는 상황이라 그의 뒤를 따라갔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는 갑자기 지갑에서 엔화를 꺼내더니 민하의 음식값까지 대신 지불해 버렸다. 놀란 민하가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듯, 계산을 담당하는 점원도 어리둥절해 했다.


민하는 결제를 마치고 출입구를 향해 나아가는 남자의 손목을 다급하게 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아니, 왜 제 몫까지 계산해 주시는 거죠? 제 건 제가 해도 되는데…….”
 
 “그낭요. 반가워서요. 외국에서 한국 사람 만나면 괜히 반갑거든요. 저도 모르게.”
 
 “아니, 그래도 이렇게 계산해 주시면 저는 뭘로 갚아야 하죠?”
 
 “그럼 커피 사주실래요? 저는 후쿠오카에 적어도 3달 정도는 더 있을 예정인데요. 그쪽은 언제까지 여기 계시나요?”
 
 “아, 저는 일주일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내일 만나죠. 뭐.”
 
 “네?”
 
 “인스타그램 하시죠? 제 인스타 계정 알려드릴게요. DM으로 연락해요.”
 
남자는 아까 규동집에서 계산하고 받은 영수증 뒤에 자신의 인스타 계정(@worldtravel_js_2)을 휘갈기듯 써준 뒤에 홀연히 사라졌다. 민하가 붙잡을 새도 없이 아주 빠른 걸음으로 말이다. 당황한 민하는 그가 남긴 영수증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로 들어온 민하는 손을 씻기도 전에 침대에 앉아 그의 인스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피드 상단만 살펴봐도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기야 인스타그램 아이디에도 ‘travel’이 들어가지 않았던가. 남자는 모든 사진들에 아까 보았던 그 녹갈색의 커다란 배낭과 함께였다. 보아 하니 유럽 일주도 한 것 같았고,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도 해본 듯 했다. 아까는 너무 당황스러워 몰랐지만, 외모도 꽤나 준수했다. 성격도 나름 시원시원해 보였다. 깊게 대화를 나눠본 것이 아니니 정확히 파악할 길은 없었지만….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 민하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에게 DM을 보냈다. 
 
 “아까 규동 집에서 만났던 사람이에요. 식사 대접해 주셔서 감사해요.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충분히 감사하다는 말씀도 못 드렸네요. 저도 커피 말고 똑같이 맛있는 식사 ㄷ접하고 싶은데, 언제 시간이 되시나요?”


답장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남자는 정확히 1분 만에 답을 했다. 
 

“아, 안 그래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어요. 커피 말고 식사라, 저는 더 좋은데요? 그쪽은 언제가 시간이 괜찮으세요?”


“아, 저는 오전이 좋습니다.”


“네, 그럼 우리 하카타역에서 다시 만나요. 오전 10시 괜찮으시죠? 내일 비가 많이 온다고 하더라고요. 우산 꼭 챙겨서 나오세요. 혹시 우산 없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저 배낭에 우산 큰 거 2개나 있거든요. 그것도 아주 튼튼한 걸로 말이죠. 후쿠오카에 오래 계실 것도 아닌데 우산 새것으로 살려면 돈 아깝잖아요. 짐이기도 하고요. 부담 없이 말씀해 주세요. 정말로.”
 
하카타역 안의 작은 규동 집에서 잠시 스쳤던 사람이지만, 상대방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밥값을 계산한 저돌적인 사람이었지만, 의외의 세심함과 다정함에 묘하게 마음이 설레는 민하였다. 어쩐지 지금 입고 있는 물 빠진 티셔츠와 바지는 벗어 던지고 혹시 몰라 챙겨왔던 민트색 원피스로 갈아입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대화를 마치고 곧바로 캐리어를 열어 아무렇게나 접혀 있었던 원피스를 옷걸이에 고이 걸어 둔 민하. 이대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에 캐리어 구석에 챙겨둔 마스크팩을 붙이고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주체할 수 없이 자꾸만 피어오르는 설렘. 5년 동안 일만 하며 사느라, 느껴본 적 없었던 몽글몽글한 감정이 민하의 마음을 간질였다. 특히 민하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문장은 바로 이것. 


“우리 하카타역에서 다시 만나요.”


두 사람이 인연이 시작된 곳에서, 또다시 만나자는 제안. 물론 그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말했을 확률이 높지만, 민하는 속절없이 가슴을 지배하는 설렘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민하는 캐리어를 탈탈 털어, 챙겨온 화장품을 모두 꺼냈다. 잘 하지 않던 마스카라까지 하고 고데기로 웨이브를 넣었다. 아끼던 원피스까지 챙겨 입고 길을 나선 민하. 조금 일찍 호텔을 나선 민하는 그를 위한 치즈 케이크를 구입했다. 조각 케이크 치고는 가격이 퍽 비쌌다. 무려 천 엔이었다. 한화로 하면 만 원. 적지 않은 금액임이 분명했지만, 식사까지 대접해주었는 데다가, 왠지 모를 설렘을 가져다 준 그에게 이쯤이야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케이크 구입까지 마친 민하는 길 건너 하카타역 쪽으로 다가갔다.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10시였다. 약속 시간이 되어도 그가 나타나지 않자, 민하는 조바심이 났다. 5분 쯤이 흘렀을까, 멀리서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등장했다. 
 
 “늦어서 미안해요. 핸드폰을 두고 와서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오느라 늦었어요.”
 
 몹시 미안해하는 남자에게 민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별로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어요.”
 
민하의 답에 남자는 이내 미소를 되찾고, 어느 카페를 가면 좋을지 물었다. 이때다 싶어 민하는 전날 밤, 미리 알아봐 둔 카페의 이름을 꺼냈다. 하카타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하카타역 서쪽 출입구 인근에서 10분만 걸어가면 보이는 작은 카페였다. 크림이 올라간 라테가 예술이라는 곳. 그곳으로 함께 가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남자는 흔쾌히 좋다고 답했다. 그렇게 민하와 남자는 나란히 보폭을 맞추어 카페를 향해 걸어갔다. 카페는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협소했다.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고작 3개뿐이었다. 다행히 이른 아침 시간대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고 운 좋게 한 테이블을 차지할 수 있었다. 
 
 자리를 잡은 민하는 다가오는 점원에게 메뉴판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크림라떼 2잔을 주문했다. 민하가 주문하는 모습을 남자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주문을 마친 뒤, 느껴지는 남자의 시선에 민하 역시 그를 쳐다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어색함을 견디다 못한 민하가 먼저 운을 뗐다. 
 
 “일본 여행은 어떻게 오게 되신 거예요?”
 
 “아, 사실 제가 10년을 만났던 여자친구랑 헤어졌어요. 갑자기 일방적으로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았는데, 받아들일 수가 없겠더라고요. 집 앞에 찾아가서 매달려 보기도 하고, 별짓을 다 해봤는데 잡히지가 않더라고요. 그날 이후로 점점 우울하고 무기력해지는 제가 싫었어요. 마침 회사에서도 안식년을 갈 수 있는 시기가 와서 일단 무작정 일본으로 왔어요.” 
 
 “아…그러셨구나.”
 
민하가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무렵, 크림라떼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몽글몽글한 크림이 올라가 있는 라떼, 한 모금 마시자마자 입 안 깊숙이 밀려오는 고소함에 두 사람은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와! 이거 정말 맛있네요.”
 
 만족스러운 듯한 남자의 반응에 민하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 시간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다. 크림라떼 잔이 서서히 바닥을 보여갈 무렵, 민하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남자에게 물었다. 
 
 “혹시 어제 규동 사주신 이유가 정말로 제가 한국 사람이라서가 맞나요.?”
 
 확실한 답을 알고 싶다는 민하의 의도가 담긴 질문에 남자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솔직한 마음을 답했다. 
 
 “사실 가게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민하 씨를 발견했어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데도 눈에 띄더라고요. 한국 사람인 건 당연히 알았고…그리고 사실은 민하 씨가 너무 예뻐 보였어요. 가볍게 들어 올려 묶은 머리 스타일도, 연갈색의 눈썹도 마음에 들었어요. 커다란 눈도요. 전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저 진짜 그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거든요. 근데 민하 씨를 보자마자, 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더라고요. 그런데 다짜고짜 처음 보는 민하 씨에게 들이댈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다시 만날 구실을 만들기 위해, 묘안을 떠올렸죠. 그게 바로 제가 밥값을 계산하는 거였어요. 혹시라도 티가 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전혀 모르시는 눈치더라고요.”
 
 그러했다. 남자는 민하가 마음에 들어 작업을 걸었던 것이다. 민하는 그 작업에 단 번에 걸려들었던 것이고. 
 
무슨 이유에선지 조금 허탈한 감정이 밀려오긴 했지만, 민하는 남자의 답이 퍽 마음에 들었다. 예뻐서, 마음에 들어서 밥을 사주었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민하 역시 남자의 준수한 외모가 썩 마음에 들던 차였다. 게다가 세심하기까지 했고. 카페에서 나온 두 사람은 15분을 더 걸어 현지인들이 자주 간다는 선술집에 갔다. 한낮이었지만 다행히 가게는 영업 중이었다. 
 
가게 안은 조용했고, 종업원도 음식과 생맥주를 가져다줄 때를 제외하고는 일체 그들의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사실상 둘만 있다고 해도 무방한 장소였다. 둘은 서로의 연애 이야기부터, 살아온 시간들까지 장장 5시간에 걸쳐 수다를 떨었다. 목이 마르면 맥주를 추가로 주문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해 사케까지 마시고 또 마셨다. 
 

민하는 술이 센 편이라, 괜찮았으나 남자는 완전히 취해버려 인사불성이 되고야 말았다. 차가운 물을 권했지만 자신은 술에 취하지 않았다며 한사코 마시지 않겠다고 버텼다. 술이 깰 때까지 기다리려다가 어쩔 수 없이 민하는 친절한 종업원의 도움을 받아 선술집 밖으로 그를 데리고 나왔다. 택시를 잡으려는데, 퇴근 시간대가 가까워져서인지 도무지 잡히질 않았다. 당황한 민하는 일단 인근 벤치에 그를 앉혔다. 
 
벌겋게 붉어진 얼굴로 셔츠의 단추까지 풀고 정체 모를 노래를 부르던 남자는 갑자기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술이 문제였다. 얼마나 많이 토하는지, 민하는 충격을 받아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지나가는 일본인들 모두 힐끔힐끔 그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당혹스러움에 어쩔줄 모르던 민하는 가방 속에서 휴지를 꺼내 그의 입가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금 닦아주면 또다시 굉음을 내며 구토하고, 나중에는 콧물까지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옷이 더러워지더라도 민하는 그를 끌고서라도 아까 얼핏 들었던 숙소로 데려다 주려고 했다. 다시 그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붙잡고 흔들자, 예상치 못했던 이름이 튀어나왔다. 
 
 “윤주야,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고.”
 

순간 민하는 남자와 함께했던 오늘 하루의 모든 시간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무심코 튀어나온 어떤 여자, 그러니까 옛 여자친구로 추정되는 그녀의 이름에 민하는 이상할 만큼 빠른 속도로 남자에 대한 호감과 설렘이 사라져 갔다. 독한 사케 때문에 술이 센 민하 역시 살짝 취기가 올라 열에 들떴었는데, 갑자기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술 때문이겠거니 이해가 됐던 그의 구토도 참을 수 없이 더럽다고 느껴졌다. 그의 구토 냄새에 민하 역시 구토가 밀려올 지경이었다. 
 
 남자는 계속해서 인사불성이었다. 점점 남자의 곁으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민하는 한 발 뒤로 빠져 서 있었다.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그를 어떻게든 호텔에 데려다 주겠다는 마음이었는데, 그런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지금. 민하는 그를 이곳에 버려두고 가고 싶었다. 
 
 때마침 옆에서 익숙한 한국말이 들렸다. 한국인 유학생으로 추정되는 어떤 남자였다. 
 
 “무슨 일이세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분명 민하를 향해 던진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남자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재빨리 가방을 챙겨 다시 하카타역으로 달렸다. 유학생 남자가 “저기요”를 외치며 계속 그녀를 불렀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역 쪽으로 뛰었다. 굽이 낮은 구두를 신었음에도,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민하는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인사불성이 된 남자를 버리고, 전력 질주를 해서 다시 하카타역으로 돌아온 민하는 역 앞의 쓰레기통 앞에 멈추었다. 그런 다음, 자켓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 아까 남자가 선물이라며 주었던 작은 초콜렛 상자를 빼서 쓰레기통 입구를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퍽’ 하고 초콜렛 상자가 쓰레기통으로 무사히 안착하자, 민하는 발길을 돌려 호텔로 돌아갔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민하는 핸드폰을 꺼 버리고, 애써 입었던 원피스를 캐리어에 집어 던졌다. 이윽고 유난히 희게 느껴지는 베개에 한쪽 뺨을 파묻었다.
 
 
 이튿날, 아침. 민하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갔다. 
 민하의 인스타그램에는 그 남자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DM이 20통이나 도착해 있었지만,

그녀는 끝내 그것을 확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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