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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Feb 28. 2023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지난주 금요일, 나는 가방에 책 2권을 넣었다. 요조, 신형철 작가님의 신간을. 읽고 싶었으나, 바쁘다는 핑계로 읽지 못한 그 책들을. 혹여나 모서리가 접혀 책이 상할까 봐 조심스럽게 가방 깊숙한 곳에 넣고 집을 나서는 길. 어쩐지 모를 설렘에 유난히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분주하게 쌓여있는 업무들을 쳐내고, 재빨리 컴퓨터를 껐다. 한껏 어질러져 있던 책상들을 말끔하게 치우고 가방을 들었다. 두꺼운 책 2권이 들어있어 묵직했으나, 서둘러 어깨에 들쳐매고 사무실을 나섰다. 평소 같았다면 버스에 올랐겠지만, 그날은 그저 잠시 거리의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걷고 싶었다. 습관적으로 꺼냈던 교통 카드를 다시 지갑 속에 넣어두고, 두 발로 힘차게 걷고 또 걸었다. 


주변 상가들의 간판에 'hill'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정도로 아주 높은 언덕. 6cm 굽이 있는 부츠를 신고, 있는 힘껏 그 언덕을 넘어 스타벅스에 도착했다. 


집으로 가는 길 근처에 새로 생긴 스타벅스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다. 특유의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그곳에서 나는 평소 즐겨 마시던 자몽 허니 블랙티 대신, 루이보스 티를 주문했다. 진하게 우려진 티 한 잔을 받아들고, 이내 자리를 잡고 앉은 나는 어깨를 짓누르던 가방을 내려놓고 신형철 평론가의 '인생의 역사'를 펼쳤다. 단숨에 읽어내리고 싶은 욕망이 피어올랐지만, 시간이 없어 미처 시작도 하지 못했던 바로 그 책.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루이보스 티가 식기를 기다리며, 첫 장을 펼쳤다. 


'아······' 


첫 페이지를 보자마자, 놀랍도록 간결한 문장과 그 속에 또렷하게 녹아든 평론가님의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통찰력이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뜨거운 김을 뿜어내던 티가, 이제는 서서히 식어 미지근해질 때까지 나는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한 장 한 장 읽을거리가 줄어드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엄청난 책 앞에서 나는 주문한 티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그렇게 활자들의 향연에 그만 마음을 내어주고 말았다. 


2시간이 넘도록 갈증도 무시한 채, 책 읽기에 열중했다. 인상 깊은 구절을, 아니 탄성을 부르는 문단을 베껴 쓰는 시간도 아까워 눈으로 저장하기 바빴다. 그렇게 절반을 읽고서야 나는 식어 빠져버린, 너무 우러나서 진해져 버린 루이보스 티를 맛볼 수 있었다. 


이토록 무언가에 몰입한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복잡했던 머리가 단숨에 개운해졌다. 이 순간만큼은 막연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곧 내게 닥쳐올 일생일대의 행사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로지 활자에 집중하는 시간,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으로 담기에 바빴던 시간이었다. 조금 더 카페에 머물며, 함께 챙겨온 요조 작가님의 신간 '만지고 싶은 기분'도 다시 펼치고 싶었다. 그러나 첫 장을 펼쳐든 내게 앞치마를 두른 파트너가 다가와 말했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저희가 영업시간이 오후 9시까지라서요."


알겠다고 답했지만, 어쩐지 모를 진한 아쉬움이 몰려왔다. 곧장 집으로 가는 대신, 나는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가방을 품에 안고 산책을 했다. 꽤나 쌀쌀한 날씨였지만,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겨울의 마지막 발악으로 추측되는 차가운 바람을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뱉으며 머릿속을 헤집어놓던 생각들을 정리했다. 그렇게 한참을 동네를 돌고 돌던 나는 금요일 밤의 휴식을 끝내고 마침내 집에 들어갔다.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일찍이 들어와 집을 지키고 있던 동생에게 밝게 인사를 건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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