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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Oct 04. 2023

과일을 먹으며, 책에 파묻히는 일

결혼 직전에 맞이하는 추석은 왜 이렇게 남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길고 길었던 추석 연휴 내내,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기분이 자꾸 가라앉았다. 입은 웃고 있는데,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연휴 기간을 이용해 막바지 결혼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 했으나, 나는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천장만 바라보거나,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유튜브 영상만 하염없이 시청했다.


그렇게 3일이 흘러갔다. 자꾸만 가라앉는 몸과 마음에 휘둘려 시간은 순식간에 흐르고 말았다. 모처럼의 긴 연휴인데,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건 싫어서 백팩 속을 뒤적였다. 다행히 혹시 몰라 챙겨왔던 책이 한 권 들어있었다. 


손바닥만 한 작은 책을 들고 방을 벗어나 거실로 향했다. 거실 위의 넓은 식탁에는 엄마가 준비한 샤인머스캣과 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이제 막 씻은 듯 물기를 가득 머금은 샤인머스캣 한 알을 입안에 넣었다. 특유의 달콤함이 가라앉은 기분을 서서히 끌어올려 줬다. 또 다시, 샤인머스캣 한 알을 더 집어먹으며 책을 펼쳤다.


'과학기술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내용.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신선한 접근법을 담은 내용에, 나는 또다시 가방을 털어 형광펜을 찾아 마음을 움직이는 문장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언제든 책을 열어도 그 문장들이 내 눈을 사로잡도록. 그렇게 책 가득, 눈이 시릴만큼 형광펜으로 칠을 하고 나서야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책을 덮은 후, 나는 동생과 함께 경주 황리단길로 향했다. 가장 먼저 발걸음이 닿은 곳은 '어서어서' 서점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른 곳. 그곳에서 나는 평소 좋아하던 문보영 시인의 에세이를 한 권 구매했다. '일기시대'라는 독특한 제목에 이끌려 끝내 결제할 수밖에 없었던 책. 일기 전문가 문보영 시인이 '일기'에 대해 쓰는 글이라면 억만금을 주더라도 꼭 사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문보영 시인의 에세이를 품에 안고 다시 북적이는 황리단길 거리로 나섰다. 어찌나 사람이 많던지, 혼미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동생과 함께 다시 걷고 또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문보영 시인의 에세이를 펼쳤다. 확실히 시인이 쓰는 에세이는 독특함이 있다. 그 특유의 독특함에 매료되어, 나는 자야할 시간을 넘겼음에도 여전히 방에 불을 밝힌 채로 책 속에 파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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