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세이스트 Sep 25. 2023

출구 없는 시의 세계로 들어가다

계속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욕심. 내가 죽으면 육신은 소멸되어도 나의 기록만큼은 남아 사람들에게 읽히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가능한 많은 글을 쓰고, 여러 책을 펴내고자 했다. 


그러나 결혼 준비를 시작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회사 이외의 모든 시간들을 결혼에 투자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글과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말았다. 늘 가슴 한구석이 아팠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글을 많이 쓸 수 없는 환경에 계속 있었으니까. 잘 쓰지는 못해도,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가득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까. 


그렇게 제법 시간이 흘렀다. 이젠 결혼에 필요한 굵직한 일들은 대부분 끝냈다. 신혼집 입주와 가전과 가구를 사야 하는 이슈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아직 시간이 있으니 무게를 두지 않기로 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 마음이었다. 글을 쓰고 싶은 내 마음. 애끓고 있던 나를 다독이기 위해선 무엇이든 써야 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노트북 앞에 앉으니 막상 글이 써지지 않았다. 거의 완성 상태였던 소설도 다시 보니 엉망진창이었다. 모조리 엎고 다시 작업해야 할 상황이었다. 물론 그때의 내 마음과 지금의 내 마음, 그리고 초고를 작성할 때보다 훨씬 더 성숙해진 나로 인해 발생한 상황이지만...


다시 소설 원고를 수정하고, 새로운 글을 쓰기 전에 워밍업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동안 고생했던 나를 위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어떤 것이 좋을까 알아보다가 '밑미'라는 플랫폼에서 진행하는 '시 읽고 글쓰기' 리추얼에 신청하게 됐다. 매일 아침 시 한 편을 읽고 자신의 단상을 짧게 남기는 프로그램이었다. 사실 시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시'라는 장대한 세계에 살짝 발을 들여보고 싶어 순식간에 결제까지 마쳤다. 


3주간의 과정에서, 나는 주말을 제외하고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를 읽고 글을 써서 인증했다. 지독한 장염에 걸려서 응급실을 가야 할지 고민하던 상황 속에서도 시를 읽었다. 거듭되는 시련에 마음이 주저앉을 때도 시를 눈에 담았다. 그렇게 나는 안미옥 시인의 시집인 '온' 한 권을 다 읽어내고 각각의 시에 대한 내 생각도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투박하지만, 진실한 나의 생각을 흰 노트에 빼곡하게 채워나갈 수 있었다. 



시를 읽고 해석하는 것에는 정답이 없다. 나의 세계에서 나만의 기준으로 해석해도 그만인 것이다. 누구도 그에 대해 입을 댈 수 없다. 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해석을 읽고 다시 한번 새로운 감상에 젖어들 수도 있는 것이고. 정답이 없는 시라는 세계 속에서 유영하며 나는 점점 시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 문학 주간 2023 '소리-채집' 행사를 만나게 됐다.


문학 주간 행사 동안 열리는 다양한 공연 중에서 나는 황인찬 시인과 생각의 여름이 함께 하는 '시냇가'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미진님이 공지를 보자마자, 바로 예매해 주신 덕분에 가장 앞자리에서 황인찬 시인의 낭독을 듣고 생각의 여름의 서정적인 노래를 귀에 담을 수 있었다. 황인찬 시인의 낭독은 가히 예술에 가까웠고, 생각의 여름의 보이스 역시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행사를 기획하신 유희경 시인님의 진행이었다. 과하지 않고 적당하게, 그렇지만 유쾌하게 행사를 이끌어 간 탁월한 진행자셨던 유희경 시인님. 



한낮에 방문했던 위트앤시니컬에서 구입했던 유희경 시인님의 산문집에 직접 사인도 받았다. 시인님을 바라보면서 가방 속에서 황급히 책을 찾고, 볼펜을 꺼내어 함께 내미는 순간의 짜릿함이란. 갑작스러운 요청이었지만, 시인님은 흔쾌히 정성을 담아 사인을 해주셨다. 아름다운 글까지 덧붙여서. 시인님의 사인이 담긴 산문집을 품에 안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앞으로 더더욱 시를 사랑하게 될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여름의 흔적은 서서히 옅어지고, 이젠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가을과 함께 시를 좋아하는 나의 마음도 더 진해지고 있다. 오늘도 안미옥 시인의 시집에서 시 한편을 꺼내어 읽었다.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생각할 때 바깥이 생겼다.

나는 이제 꺼내놓을 것들을 꺼내놓는다." - 안미옥 시집「힌트 없음의 조망 中」


시를 읽으며 나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던 부정적인 마음. 이를테면 근심, 걱정, 염려를 세상에 꺼내놨다. 품었던 것을 꺼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렇게 나는 매일 아침 시를 읽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꺼내놓고, 몸과 마음에서 멀리 떠나보낼 것이다. 이 작업을 부단히 반복하다 보면, 조금 더 나은 나를 마주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예비 신혼부부가 건넨 특별한 선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