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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Dec 08. 2021

온 가족이 함께 경주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출근의 의무에서 벗어난 일요일, 하루 종일 동생과 함께 집에만 있었다. 먹고, 자고, 수다 떨기를 반복하다가 보니, 어느덧 창밖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분명 계속 이것저것 먹었는데, 밤 10시가 되니 배가 고팠다. 동생과 나는 '우린 도대체 하는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배가 고픈 거야?'라고 구시렁거리며,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날씨가 쌀쌀한 탓에 무거운 패딩에 목도리까지 둘렀다. 완전 무장을 하고, 길 건너편에 있는 단골 부대찌개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네에 3~4곳의 부대찌개 전문점이 있었지만 우린 항상 그곳으로 갔다. 경주에서 올라와 유난히 간이 센 음식을 좋아하는 우리에게 더없이 완벽한 짜디짠 부대찌개를 내어주는 곳이었으니까. 사리까지 추가하여 2인분을 주문하고, 동생과 함께 신나게 먹었다.

슬슬 허기가 사그라들 무렵, 우연히 옆 테이블을 보게 되었다. 5인 가족이 앉아 있었다. 엄마와 아빠로 보이는 어른 2명과 고등학생, 중학생쯤으로 추정되는 자녀 3명이 옹기종기 붙어 맛있게 부대찌개를 먹고 있었다. 당시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이라 식사 시 대화에 전혀 제약이 없던 때였다. 그들은 국물을 떠먹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빠는 아이들에게 국자로 부대찌개를 덜어 주었고, 엄마는 혹시나 갈증이 날 것을 염려하여 연신 컵에 음료수를 부어주었다. 때로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고, '요즘 학교는 어때?'라며 시시콜콜한 일상을 묻기도 했다. 참 보기 좋았다. 온 가족이 한데 모여 저녁을 먹는 모습이. 게다가 서로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함께 웃는 모습이. 

그런데 동생과 나는 어떠한가. 드넓은 식탁에는 오직 둘뿐이었다. 물론,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서로를 살뜰하게 챙기지만. 그래도 모든 가족이 함께 모여 있는 것과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내가 한참 동안이나 그 가족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으니 동생이 언니, 왜 그러는 것이냐고 물었다. 난 그냥 부러워서 그런다고 답한 뒤,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날 이후로, 우리 가족이 함께 경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정작 대학교 때까지, 함께 살 때는 따로 떨어져서 살아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함께 살지 못한 지 4년이 넘어가니 그 시절이 왜 이렇게도 그리운 것일까. 


엄마, 아빠가 퇴근을 하면 현관으로 달려가 '다녀오셨어요' 인사를 하고,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엄마가 정성스럽게 차려 준 따뜻한 저녁 밥상을 마주하는 일상으로 이렇게 돌아가고 싶을 줄 몰랐다. 주말이면 함께 카페를 가서 수다를 떨고, 겨울이면 아빠의 휴무일에 맞춰 여행을 가던 그 소중한 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질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때로 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서울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고, 동생은 서울시 지방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빛나는 청춘의 시기를 노량진에서 공부를 하며 보내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직업이 마케터이기에 경주로 돌아가면 다닐 만한 직장이 아예 없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나와 동생은 경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안타깝고 절망적이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현실적인 한계를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그런 소원을 빈다. 온 가족이 함께 경주에서 살아가는 순간이 찾아오기를. 함께 매일 저녁을 먹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밤이면 한 침대에서 잠들 수 있기를. 

서울에서 살아가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부모님의 품이 그리워진다. 이미 다 커버렸지만, 그래도 때로는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날 때가 있다. 한 달에 1~2번 밖에 보지 못하니 점점 더 애틋함이 커져간다. 늦둥이 남동생은 볼 때마다 쑥쑥 커서 이제 정말 성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부모님은 그렇지 않다. 왜 자꾸 점점 더 야위고, 세월과의 싸움에서 이기질 못하는 것인지. 조금씩 늘어나는 흰머리와 얼굴을 장악하기 시작한 주름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내가 곁에 있었더라면, 더 잘 해 드릴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한 달에 한 번, 경주로 내려갔다가 서울로 올라오는 날이면 마음이 아프다. 온 가족이 함께 경주에서 살 수 없다는 슬픔과 괴로움, 아쉬움에 자꾸만 눈물이 차오른다. 애써 참고, 엄마와 아빠, 남동생에게 인사를 건네고 홀로 기차에 오르면 순식간에 외로움에 사로잡힌다. 

아마 여동생도 그럴 것이다. 나처럼 겉으로 표현은 잘 하지 않지만, 본인이라고 왜 다 같이 살고 싶지 않겠는가.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동생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언니로서 노력한다. 부모님의 빈자리를 메워 주기 위해서. 부모님 만큼은 아니지만, 힘든 공부를 마치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노량진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동생을 위해 야식을 준비하고 다정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 지금 내 상황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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