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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Jan 03. 2022

어느 지독한 편식쟁이의 고충

참 웃긴 것은 편식도 부지런해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통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왜 나는 지독한 편식쟁이가 되어버린 것일까.


엄마, 아빠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버렸다. 당신들의 큰딸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야채를 먹지 않았다. 채소를 잘게 다져서 볶음밥을 만들어주면, 기가 막힐 정도로 야채만 쏙 빼놓고 밥만 먹었다. 엄마가 정성스럽게 만들어준 유부초밥에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당근이 들어 있으면, 그것 또한 귀신 같이 빼고 먹었다. 얼마나 야채를 안 먹었으면, 엄마는 나중에 채수를 우려내서 주며 "제발 이렇게라도 야채 좀 먹어라!"라고 말씀하셨었다. 

지독한 편식쟁이었던 큰딸 탓에 엄마는 소풍날 꽤나 고생을 하셨다. 다른 집 엄마들은 김밥 전문점에 가서 사서 도시락에 넣어주기도 했는데, 엄마의 큰딸은 어림도 없었다. 오이, 당근, 우엉, 시금치를 모두 제거하고 그 빈 자리에 다진 소고기를 넣어야 했으니까. 마트에서 가장 값나가는 비싼 소고기를 사서 양념을 하고 잘게 다져 야채들이 모두 빠진 자리를 야무지게 채워주어야 했으니까. 덕분에 난 친구들 사이에서 스타였다. 매번 소풍 때, 흔한 야채 김밥 대신 소고기가 가득 담긴 황제 김밥을 들고 왔었으니까. 

야채를 보기만 해도 토악질을 하는 딸에게 엄마는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게 철없이 편식하면서 살래?"라고. 그럼 난 이렇게 응수했다. "어른 되면 안 그래! 걱정 마!"라고.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난 여전히 지독한 편식쟁이다. 회사 구내식당에서 비빔밥이 나오면, 근처에도 가지 않고 밖에 나가서 다른 것을 사서 오거나, 아니면 야채는 모두 덜어내고 고추장에 비빈 그냥 밥만 먹는다. 맥도날드에 가서 햄버거를 먹을 때면 키오스크 옵션 설정에 들어가서 양상추와 양파는 무조건 뺀다. 


참 웃긴 것은 편식도 부지런해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야채는 기본 베이스로 깔려 나온다. 햄버거도 샌드위치도 모두 야채가 한가득이다. 백반을 주문해도 마찬가지다. 반찬들은 대부분 시금치, 콩나물 무침 등 야채 파티다. 야채가 많은 음식을 피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메뉴판을 살펴봐야 하고, 주문할 때 어떤 야채가 들어가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 간혹 실수로 야채가 포함되어 나오면, 그걸 일일이 빼내는 수고로움까지 필요하다. 


가끔 너무 귀찮아서, 까짓꺼 그냥 먹어볼까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실제로 실행에 옮긴 적도 있으나 오랫동안 야채와 담을 쌓고 살아서일까. 속이 확 뒤틀리면서 화장실로 뛰쳐갔다. 그러고는 변기통을 부여잡고 내 위장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었는지 내 두 눈으로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한 가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릴 때보다는 먹는 야채의 가짓수가 좀 늘어났다는 것이다. 물컹거리는 식감 때문에 기피했던 버섯도 이젠 잘 먹는다. 특유의 향 때문에 꺼렸던 마늘도 없으면 섭섭하다. 고깃집에 가면 쳐다도 보지 않았던 파채 무침도 추가로 주문할 정도로 사랑한다. 여전히 지독한 편식쟁이임에는 틀림없지만, 조금씩 맛보고, 시도해 보는 야채가 늘어날수록 무언가 건강해지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마흔이 되면 진짜 향만 코끝에 스쳐도 경기를 일으키는 '오이'도 먹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아니다, 그래도 오이는 안 될것 같다. 


지독한 편식쟁이의 삶은 부지런해야 하고, 메뉴 선택에 엄청난 불편이 따른다. 체중도 쉽게 불어나고, 몸도 잘 붓게 되며, 혈액 순환도 잘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갈수록 확실히 느껴진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미 많이 늦은 것을 알고 있지만 조금씩 식습관을 고쳐나가고 싶다. 


오이는 힘들어도, 시금치는 먹어봐야지. 

오이는 힘들어도, 가지는 먹어봐야지.
오이는 힘들어도, 토마토는 먹어봐야지.

오이는 힘들어도, 양파는 먹어봐야지.

오이는 힘들어도, 양상추는 먹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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