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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Feb 08. 2022

2인 가구의 요리사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부족한 것이 많지만 그래도 '요리'를 합니다.

4년 전, 수도권으로 대학 진학을 하게 된 여동생을 따라 서울로 오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2인 가구의 삶은.

나는 동생보다 3살이 많은 언니라는 이유로 우리 집의 가장이 되었다.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의 실질적인 보호자가 되면서 한 가정을 전적으로 책임져야만 했던 엄마, 아빠의 노고와 슬픔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 가장이 된다는 것은 실로 버거운 일이었다. 집안의 모든 살림을 책임져야 했으며, 생활비를 부담해야만 했다. 감사하게도 동생과 함께 산다는 조건 하에 부모님께서 월세를 지원해 주셨다. 하지만 그 외에 나머지 관리비나 부식비, 이것저것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나의 책임이었다. 

그래도 금전적인 문제는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나도 회사에 다니며, 일정한 수입을 거두고 있으니까.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요리였다. 서울에서 수원까지 통학을 해야 하는 동생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교수가 수시로 내어주는 과제로 인해 늘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그런 상황에서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드는 것은 모두 나의 책임이 되었다. 

요리를 워낙 좋아하고, 잘 하는 엄마 덕분에 난 살면서 주방 가까이 가본 적이 없었다. 라면 하나 겨우 끓일 줄 아는 정도로 요리에 무지했다. 사과나 배도 깎을 줄 몰랐으며, 심지어 쌀을 몇 번 씻어야 하고 전기밥솥을 어떻게 사용하는 지도 몰랐다. 아무런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2인 가구의 전속 요리사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라면을 끓일 줄 안다고 해서, 매일 그것만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배달을 시키면 되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매번 배달을 시켜 먹기에는 금전적 부담이 상당할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해롭다. 짜고 매운 자극적인 음식을 일주일에 1~2번도 아니고 매일 시켜먹었을 경우, 아무리 20대라고 하더라도 금세 건강에 적신호가 켜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초반에는 일주일에 많게는 4번까지도 배달 음식에 의존했었다. 그 결과, 다음날 아침이면 온몸이 부었으며 살도 많이 불어났다. 계속해서 자극적인 음식을 먹는 탓에 장염이나 위경련도 쉽게 찾아왔었다. 결국 직접 요리를 하기로 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선택이었다. 2인 가구의 가장으로서 나뿐만 아니라 함께 살고 있는 여동생의 건강까지도 챙겨야 했으니까. 내게는 그런 의무가 있었으니까. 

야심차게 도전한 첫 요리는 김치볶음밥이었다. 어떤 요리 유튜브에서 본 것처럼 프라이팬에 버터를 두르고 서서히 녹였다. 그런 다음 냉장고에서 외할머니께서 겨우내 직접 담그신 김치를 꺼내 잘게 잘랐다. 부엌 한 켠의 수납장을 열어 스팸도 꺼내 한 입에 먹기 좋게 잘라주었다.

한껏 달궈진 팬에 김치와 스팸을 넣고 달달 볶았다. '취사가 완료되었다'며 보고를 하는 밥솥을 열고 갓 지은 밥을 후라이팬에 덜어 넣었다.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냉동실에 얼려둔 대파도 넣고 설탕도 가득 넣었다. 점점 분식집에서 볼 법한 형체를 갖추어 가는 볶음밥에 마지막으로 외할머니께서 직접 농사지어 방앗간에 가서 짜 주신 참기름도 크게 두 바퀴 둘렀다.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렇게 센 불에 후다닥 볶고 동생과 내 몫을 그릇에 덜어 통깨까지 솔솔솔 뿌렸다.

한 겨울에도 땀이 날 정도로 집중해서 만들었지만, 겁이 났다. 첫 도전이기도 했고, 이렇게나 많은 재료들을 넣었음에도 맛이 없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나의 불안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생은 크게 한 숟갈을 떠서 입 안에 넣었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 뒤, 동생은 눈을 크게 뜨며 내게 '정말 맛있다.'고 영혼을 실어 말해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도 한 숟갈 뜨니 과연 동네 분식집에서 배달해 먹던 그 김치볶음밥의 맛이 났자. 놀라운 일이었다. 

인생 첫 김치볶음밥의 성공 이후로, 요리에 자신감이 붙었다. 요리 유튜브를 보면 이것저것 계량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서 귀찮았기에 내 맘대로 느낌대로 양념들을 넣었다. 달걀새우 볶음밥, 베이컨 볶음밥은 물론 떡볶이에도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인스타 사진만 보고 햄무스비를 만들기도 했고, 해물볶음을 넣은 유부초밥을 준비해 보기도 했다. 더디지만, 나날이 발전해 가는 요리 실력에 스스로도 감탄했다. 

내친김에 찌개에도 도전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찌개는 대 실패였다. 각각의 재료가 육수와 어우러지지 못하고 다 따로 놀았다. 계란말이도 망쳤다. 나름 열심히 굴려봤는데, 결국 스크램블이 되고야 말았다. 그래도 감자국은 성공적이었다. 멸치로 육수를 내고, 다진 마늘을 조금 넣고, 감자를 잘게 썰어 넣고, 칼칼한 맛을 위해 청양고추도 썰어서 아낌없이 투하해 주었다. 참기름도 잊지 않고 한 바퀴 둘러주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맛을 보니, 기적적으로 엄마가 어린 시절 해줬던 감자국의 맛이 났다. 입맛 까다롭기로 유명한 동생도 후한 점수를 주었다. 

2인 가구의 요리사가 된지도 어느덧 5년 차에 접어들었다. 여전히 사과나 배는 능수능란하게 깎지 못한다. 감자칼을 사용해 껍질을 벗겨내는 것이 훨씬 빠를 정도로. 하지만 동생의 배를 든든히 채워줄 요리에는 자신감이 붙었다. 그 힘들다는 공무원 공부를 마치고 야심한 밤, 축 처진 어깨로 집으로 돌아오는 동생을 위해 야식을 만들어 줄 정도로 성장했다. 내 나름 성장했다고 자부하지만, 어쩌면 엄마가 맛 보았을 때는 '이것도 요리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뭐 어떤가. 함께 사는 내동생의 배만 채워줄 수 있다면, 동생의 입만 만족시켜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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