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긴 나의 스페이드

반창고로 나의 기억을 감쌀 때


인생에서 다음 수를 위해 내가 철저히 감췄던 비장의 카드는 누구에게나 있다.

당신의 비장의 카드가 찢길 때,

남은 카드로 다음 승부를 내는 데는 나에 대한 용서가 필요하다.


학창 시절,

꿈을 발표하는 시간이 나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저는 국경 없는 의사회에서 일하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마음이 힘들고 몸이 힘든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꿈을 발표하고 나면 항상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에게 너무 소중한 꿈이었고, 무려 14년이란 시간 동안

내가 버텨올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나의 인생의 성공에 대한 숨겨놨던 스페이드 카드였다.


그러나 나의 스페이드는 찢어졌다.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나는 수능을 잘 보지 못했다.

힘들어진 집안 사정이었지만 그래도 버텨보려고 포기 안 하려고 노력했다.

새벽에 나가 빵 냄새를 맡으며 알바도 하며 학원비를 벌었다.


나의 스페이드 카드는 생각보다 두껍지 못했다.


매년 크리스마스는 기쁘지 않았다. 매년 연기 대상을 보며 수상하는 배우들을 봐도 나는

시큰둥했다.


'내가 잘 안 됐는데. 무슨 소용이야. 나는 내 꿈을 이루지도 못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스페이드를 위해 준비했던 나의 시간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4번의 수능 끝에 나는 입시를 접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알바를 하며 보내던 어느 날, 나는 '편입'제도를 알게 된다.

다행히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나는 내가 최고로 원한 학교는 아니지만

디딤돌로 좋은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느덧 4학년이 되었고, 25살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인턴을 알아보고 있다.


그런데, 공고를 보아도 나한텐 전혀 울림이 없었다. 간절하지가 않았다.

그냥 돈이라는 승부를 보기 위해 적합한 카드를 읽으려 애쓰는 것뿐이었다.


너무 괴로웠다. 왜 나는 나의 스페이드를 그토록 아꼈을까.


'난 대체 뭐가 문제지. 왜 하지도 못할 걸 목표로 세워가지고, 나를 이렇게 막막하게 만들어 놨지.'


여러 번의 큰 실패는 누군가에게 좌절이 될 수도 있다.


6호선 지하철을 타 합정역 빵집으로 마감 알바를 가는 나는 개찰구를 지나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가 아니라

'실패는 나의 또 다른 이야기 장'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하나의 책일지 모른다.


해리포터가 매 챕터마다 볼드모트를 이기고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지켰다면

오늘날 해리포터 시리즈는 베스트셀러가 됐을까?


그렇지 않다고 단연코 생각한다.


우리가 '단짠'을 좋아하는 거처럼 인생의 이야기가 재밌어지는 데에는

'실패'의 요소도 필요할지 모른다.


물론, 괴롭다.


특히, 최선을 다했는데, 이루지 못할 때의 좌절감은 정말 크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그런 맛이다. 너무나도 짠맛이다.


실패라는 건

주인공인 우리는 힘들고 벗어나고 싶지만,

읽는 독자에겐 다음 장을 기다리게 만드는 작용이 된달까.


오늘도 나는 다른 챕터를 만들어 가는 게 삶의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인상 깊게 본 영화 '소울'이 있다. 거기서 제리가 말한다.

'스파크는 그렇게 단순하게 아니야. 인간이란 참 못 말린다니까.'


나는 '소울'을 2번이나 보았고. 똑같이 울었다.


어쩌면 나의 스페이드가 찢긴 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승리를 위한 비장의 카드는 다른 카드였기 때문이다.


핸드폰으로 보는 인턴 공고들을 보며 나의 카드는 어떤 카드인 건지.

놓치고 있던 게 뭔지. 다시 수를 읽어보게 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