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갔다 와, 남편. 오늘 하루도 잘 보내고"
"응, 퇴근할 때쯤 전화할게. 저녁 뭐 먹을지 그때 정하자"
남편을 따라 뉴욕으로 이사를 온지도 세 달이 지나간다.
어릴 땐
꽤 주관이 뚜렷한 아이였던 것 같은데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가고 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에게 의지해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딱 건전지가 떨어진 인형 같은 삶이라 생각한다.
특히 오늘은 더더욱.
남편을 보낸 후
오래 닦지 않아 먼지가 켜켜이 쌓인 창틀에 털썩 앉아
그리 덥지도 시원하지도 않은 시큼털털한 뉴욕의 공기 냄새를 맡는다.
오늘 아침에도 아파트 현관 앞에는
나이가 지긋이 들어 세상일을 통달한 듯 보이는
월터 할아버지가 멍-한 표정으로 담배 한대를 물고서
낚시 의자에 앉아 있다.
집 앞 아주 작은 카페도 오늘따라 일찍 오픈 준비를 하고 있다.
오늘은 왠지 지구와 태양의 타이밍이 맞지 않아
평소와는 약간 다른 시간으로 흐르는 듯 한 느낌이다.
이내 정신을 부여잡고 부엌에 가서 커피를 내려올까..
생각하지만
오늘도 역시 남이 내려주는 비싼 커피를 마시고 싶다.
'남편은 지금쯤 회사에 도착했으려나'
잘 도착했다고 톡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조용한 폰을 오래돼 잘 충전되지도 않는
충전기에 억지로 꽂아놓고 나갈 채비를 서두른다.
아래, 위 코디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간단한 파스텔톤의 핑크색 원피스를 후룩 입고
제일 좋아하는 크로스백을 걸치고 나와
월터 할아버지에게 눈인사를 한 후
지하철 역으로 향한다.
항상 이 맘 때쯤이면
알러지 때문에 안약을 챙겨 나와야 하지만
역시나 오늘도 화장대 위에 두고 나와버렸다.
내가 나를 원망해서 어쩌랴..
나라도 나를 사랑해줘야지
쓸데없는 자기애를 느끼며
역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Walgreen으로 들어간다.
괜스레 있는 것을 또 사야 하니
돈이 아까워 참을까 했지만,
이내 눈이 벌게지고 눈물이 흐를 걸 생각하면
고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 대체 eye drop이 어디 있는 거야..'
매일 잘만 있던 안약이
오늘따라 보이질 않아 약 코너를 두세 바퀴 돌고 있다.
이미 알러지가 시작되어 충혈된 눈으로 뱅글뱅글 돌고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말끔히 차려입은 약사 한 명이 다가온다.
"Is there anything I can help you?"
"I am looking for an eye drop"
얼마나 멍청해 보였으면,
굳이 카운터 밖으로 나와서까지 찾아줄까
괜스레 민망하다.
"Here you go!"
"감사합니다, 앗 sorry thank you!"
도대체 영어는 언제쯤 돼야
뇌를 거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올까..
"혹시 한국분이세요?"
말끔히 차려입고 Dan이라는 명찰을 붙인
약사가 묻는다.
깜짝 놀랐지만 반갑게
"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이 동네 미국 drug store에 한인 약사가 있었나?
싶지만 사실 약국을 화장실 다음으로
자주 들락거리는 사람으로서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저는 Dan이라고 해요. 이 동네 사시면 앞으로 자주 봬요"
"네! 저는 Mia 예요. 오늘 약 찾아주신 거 감사해요"
그의 왼쪽 손가락 결혼반지가 바깥 햇살에 반사되어
내 눈을 찌른다.
눈인사를 하고
왠지 모르지만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와
온갖 냄새가 뒤섞여 불쾌한 지하철 역으로
뛰어들어간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