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인연이 될 수 있을까

그녀의 이야기 Take #9

by Kate
Screenshot_20200805-141637_Gallery.jpg Photo by Film Bros from Pexels

환기를 위해 연 창문으로 들어오는 공기에서

이제 꽤 여름 냄새가 난다.


창고에서 작년 여름 쓰고 나

커버도 씌우지 않고 박아놓은

빛바랜 하얀색의 선풍기를 꺼내왔다.


물티슈로 닦아내야 하나..

생각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어도 허벅지 밑이 끈끈해지는

이런 날씨에 굳이 하고 싶지 않아

소파에 벌렁 워서

며칠째 푹 빠져 있는

'Big Little Lies'를 튼다.


해안가 작은 마을의 이야.

각 가정마다 모두에게 다 드러낼 수 없는

치부를 보여주면서도

다섯 명의 여자들이 함께 공감하며 나누는 드라마이다.


보통 드라마들은 현실을 심하게 미화시키거나

때로는 말도 되지 않는 우연을 만들어 낸다.


그런 것들을 보다 보면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나는 왜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지

나에게도 저런 운명이 언제쯤 올지

등등...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 싫었다.



아무튼 그렇게 두 편 정도를 한 자세로 봤더니

꽤 몸이 찌뿌드드 해졌다.


장도 볼 겸 바람 쐬러 나갔다 오려고

벗어놓았던 브라만 급히 하고서

입던 옷 그대로 대충 밖으로 나갔다.


오후 6시.

여전히 해는 쨍쨍했고

사람들은 더위를 식히기 위해

그늘 밑에서 쉬고 있었다.


골목 모퉁이에 있는

작은 슈퍼 -두 사람 정도 겨우 들어갈 듯한 크기-

아저씨와 인사도 하고

아파트를 관리해주는 할머니와도

오랜만에 만나 짧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모퉁이를 돌아 나와

마트로 가는 길목 막 들어섰을 때

약간의 두통을 달래기 위한

커피 사러 가기로 했다.


두 잔의 커피를 받아 든 나는

잠시 카페 그 자리에 멍하게 멈춰 섰다.


그에게 주고 싶어 산 왼손에 든 이 커피

그에게 커피를 주고 싶다는 이 마음이

괜찮은 걸까..


꽤 오랫동안 카페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생각이 생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우선은 밖으로 나왔다.


다들 어디를 저렇게 급하게 가는 걸까

나를 뺀 모든 사람들은 다 저렇게 바쁘게 사는 걸까.

더 큰 무기력함이 나를 덮치기 전

그가 일하는 Walgreen으로 가기로 했다.


문을 닫을 시간이 다 되어 가서인지

안이 텅 비어서 그가 있는 곳이

바로 보였다.


입고 있던 가운을 벗으며

퇴근을 준비하는 그 사람.

잠시 옆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가운을 벗은 슈트 차림의 그가

어느새 나를 찾아 빤히 바라보며 웃고 있다.


괜스레 쑥스러워져 말없이

이미 얼음이 상당히 녹아 있는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커피 사러 간 김에 하나 더 샀어요"


"하하 고마워요. 이제 퇴근인데 같이 나갈까요?"


그와 나는 그렇게

어느 정도 적정 거리를 유지한 채

그새 많이 해가 기울어진 거리로 나왔다.


그도 나도 저녁시간이 되어

각자의 집으로 가야 했기에

근처 놀이터에 있는 벤치에 잠시 앉아 있다가 가기로 했다.

Screenshot_20200805-141819_Gallery.jpg Photo by Bob Ward from Pexels


해가 저물며 제법 선선해진 바람에

약간의 땀냄새가 섞인 그의 향수 냄새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커피 고마워요 지은 씨"


"아니에요, 제 것 사면서 하나 더 산 것뿐이에요"


"하하 고마워요. 전 저번 제 메시지에 답이 없길래

제가 잘못한 것이 있나 하고서

그 뒤로도 연락을 못했었어요"


아...

그날 그렇게 읽어버리고 잠에 들고 난 후

답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기억이 났다.


"아, 잘못하신 건 없어요. 제가 그 날 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어요"


"아. 그랬구나. 괜히 혼자 소심하게 걱정했네요~

아, 저기 이번 주 주말에 시간 되시면

저희 집에서 같이 점심 드실래요?

제가 맛있는 파스타 해드릴게요"


말한 적은 없지만 전부터

나는 그가 꽤나 가정 정인 남편이자

아빠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의 느껴지는 느낌이 있다.

물론 사람마다 그 느낌은 다르지만

끝까지 가보면 결국 그 첫 느낌이

맞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그의 집서 함께 밥을 먹는 것..

그것이 과연 허용이 되는 일일까

또다시 알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느낌이 들었다.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 나는

나중에 답을 해주겠노라고

간신히 이야기했고

우리는 곧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철컥


집에 들어와 보니

남편이 벌써 퇴근을 하고 집에 와

샤워를 하고 있었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에 저녁 준비를 하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에 우리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의

이름이 적힌 종이봉투가 놓여 있었다.


뒤적거리는 소리에 남편이 샤워를 하며


"저녁으로 먹으려고 사 왔어! 같이 먹자"


때마침 저녁거리도 없었는데

잘됐다 싶어 식탁에 남편이 사 온

음식들을 하나씩 꺼내어 차려 놓는다.


"베이비가 좋아하는 음식만 사 왔어. 잘했지?"

라며 배시시 웃는 그에게

나도 같이 웃으며 뽀뽀를 해주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결혼 생활 또한 그 말에

상당히 많이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멀리서 보는 남들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기 그지없으며, 근심 걱정도 하나 없을 것 같지만

막상 다가가 알게 되면 문제가 없는 가정은 없다.


때로는 그런 결혼생활에 지쳐

혼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홀연히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나 스스로에게 지친 것을

다른 탓으로 돌렸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 생활이 오래될수록

지나가는 사람이 쳐다볼 만큼 크게 웃을

행복한 일들은 줄어들지만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 차려진

식탁을 보며

익숙하지만 잔잔한, 마치 멈추지 않을 것 같은

행복함을 느낀다.


누군가 그 행복을

가위로 싹둑 자르듯

도려내 버리지 않는 이상...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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