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했던 것보다 멋들어진 복귀는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봄이라 다행스럽다.
둑흔–둑흔 (오늘도 여전히 나대는 내 심장아)
두근 두근을 넘어서 둑흔 둑흔 이긴 하지만 다행히 첫 출근 때보단 심장 박동이 소란스럽지 않다. 굳이 심장 가까이 손을 대지 않아도 귓가에 울리는 쿵쾅거림만으로 내 심박수를 측정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심장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까 염려스럽지 않은 게 어딘가. 후훗 이래서 경력직이 무섭다는 건가. (고작 알바 1 일차)
눈 딱 감고 남편에게 내일 알바를 가겠어!라고 일방적 통보를 날렸지만 돌아오는 건 역시나 침묵뿐. 머리가 띵하고 온몸에 힘이 빠지지만 그래도 괜찮다. 예상했던 일 아닌가. 다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닌 법!이라고 다들 말하던데 그 말을 믿어 볼 수밖에.
오늘은 왠지 첫 출근 날과는 다르게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세지 않아도 스르르 잠들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제발 또다시 밤을 새우고 출근하는 일은 없게 해 주소서!!
현재 시각 pm 11:00.
이 상태라면 족히 일곱 시간은 잘 수 있겠다. 서서히 숙면의 세계로 빠져들어 볼까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등골이 서늘한 이 기분은 뭐지. 분명 방금 전까지 스르르 잠이 들 것 같았는데 밀려오던 잠은 대체 어디로 달아났단 말인가. 그렇다면 서두르지 말고 우선 최면의 세계로 건너가 볼까나. 잠이 온다.. 잠이 온다.. 도저히 안 되겠다. 비장의 무기!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갖은 애를 쓰다가 양 서른 세 마리를 세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았다.
오.늘.도.망.했.다.
현재 시각 am 12:20
현재 시각 am 01:15
현재 시각 am 02:10
와. 해도 해도 너무한다. 한 시간에 한 번씩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하는 건 몸이 고될뿐더러 심적으로 괴롭다. 더디게 가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현재 시각 am 04:10을 마지막으로 더는 시계를 본 기억은 없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눈을 붙였을 뿐인데 잠에서 깬 아이 목소리가 내 귓가에 선명하게 들린다.
“엄마 나 일어났어.”
그 말은 곧 나의 알람 소리요. 반드시 붙은 눈을 떼 내야만 한다.
비몽사몽 오징어처럼 흐물대며 아이를 따라 겨우 거실로 나와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 평소 잘 마시지 않던 캔 커피 하나를 샥 하고 따서 목구멍을 열고 세 모금에 원샷을 때려본다.
자. 에너지 충전을 마쳤으니 이제 개운하게 하루를 시작해 볼까. 육아를 하다 보면 순간 이동은 물론 축지법도 가능하다. 동해 번쩍 서해 번쩍이 따로 없다. 발 빠른 나 자신 덕분에 길고 길었던 아침 일과를 끝내고 아이 등원 준비까지 마무리하고 아이보다 먼저 현관을 나섰다.
오늘도 현관까지 따라 나와 멀뚱히 날 지켜보는 아이를 의식하며 주섬주섬 운동화를 신는다.
“엄마 왜 치마 안 입었어? 엄마 어디가?”
“루다야 아빠 곧 일어나 실 거야. 엄마 다니 이모랑 글 쓰고 올게. 우리 좀 있다 만나! 유치원 잘 다녀와.”
역시나 아이의 입꼬리는 실룩거렸고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기 전에 급히 현관문을 닫았다.
오늘은 다행히 도로 집으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버스 환승 따위도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을 보아 모든 게 조금씩 익숙해지는 광경이었다. 남편만 이 생활에 익숙해지면 만사형통일 텐데.
푸르른 오월에 사회로 컴백이라. 상상했던 것보다 멋들어진 복귀는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봄이라 다행스럽다. 무더운 여름보다 쓸쓸한 가을보다 백배는 낫다. 봄을 만끽하며 오늘도 시집 대신 차창 밖 풍경을 택했다. 한참 바깥 구경에 정신이 팔린 사이 생각보다 일찍 회사 앞에 도착했다. 친구 없이 혼자 회사로 들어가려니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뻘쭘함에 온몸에 경련이 올 것만 같다. 본능적으로 빠른 걸음을 장착하고 최대한 후미진 곳을 찾아 들어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일층엔 아무도 없었고 불도 안 켜진 컴컴한 작업장 구석에 쭈구리처럼 자리를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띠동갑 남자 직원이 작업장으로 들어와 불을 켰고 사방이 환해지자 자연스럽게 띠동갑 남자 직원에게 나는 발각? 되었다. 불안한 심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다행히 기억하고 있던 이름을 더해 최대한 쿨한 인사를 건네 본다.
“안녕하세요? 우열 씨! 좋은 아침입니다!" (드라마처럼 좋은 아침~에서 끝내고 싶었지만 실패)
“언제 오셨어요? 일찍 오셨네요?”
“버스 배차시간이 잘 맞아서 좀 일찍 도착했어요.” (어색한 미소는 덤)
“아.. 그러시구나..”
참 이상하다. 현역 때처럼 매끄럽게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이럴 땐 사교성 만렙인 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저기 어디쯤 오셨나요? 나의 구세주님!
그 순간 마법처럼 저 멀리서 친구의 모습 보이고 아마 착각이겠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친구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안녕? 우열 씨? (따라갈 수 없는 쿨함) 어? 일찍 왔네?”
친구 얼굴을 보자마자 입에 모터를 단 듯 밤을 새운 것을 시작으로 친구가 도착하기 전까지의 일거수일투족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친구는 네 친구 하기 정말 힘들다는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나서야 주섬주섬 목장갑을 꼈다. 작업을 시작하자는 신호였다.
나도 빨간 칠이 되어있는 목장갑을 끼고 괜히 박수를 두 번 쳐본다. 사방으로 먼지가 풀풀 날리고 뿌연 먼지 사이로 뽁뽁이가 보인다. 우선 뽁뽁이를 켜고 4번 박스 한 묶음을 들어 컨티 위에 올린다. 어색하기만 했던 커터기에 새 테이프를 갈아 끼우자 모든 준비는 끝났다.
자. 준비하시고. 시작!
신들린 친구의 속도는 못 따라가지만 이 정도면 나름 선방했다. 헐떡이는 목장갑 따윈 쿨하게 벗어던지고 맨손으로 박스를 접어 댔다. 뽁뽁이를 정신없이 떼어내다 보니 첫 출근 땐 느끼지 못한 손맛이 느껴졌다. 이제 점선을 보지 않고 감으로 뽁뽁이를 두 장씩 떼어내고 쭈그리고 앉아 박스를 가지런히 나열한 뒤 친구 따라 철사장 시전에 돌입해 본다.
샤샤샥 제집 찾아 들어가는 뽁뽁이에 희열을 느끼고 푸르른 오월에 흘리는 땀방울에 활기를 되찾는다.
아. 내가 아직 살아있구나! 나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뭐든 할 수 있구나!
박스 하나에 바닥이던 자존감을 확 끌어올리며 이제 경단녀 말고 서른여덟 알바생이 돼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