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유 Sep 07. 2024

자! 여기 송장 드릴게요!!


살면서 10킬로를
  애 말고 들어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과일 쇼핑몰이라니.      

내가 어릴 적에 숯불갈비 집에 취직한 엄마는 늘 돼지갈비와 같이 퇴근했다. 매일 밥상엔 돼지갈비가 김치만큼 당연하게 올랐고 거짓말 조금 보태 사람이 살면서 먹을 돼지갈비를 그때 다 먹은 탓에 그 후로 오랜 세월 돼지갈비는 쳐다도 안 보고 살다가 자연스레 돼지갈비와 재회했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돼지갈비를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그렇지만 아직도 재회 못 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과일이다.

내가 엄마 다음으로 사랑하는 둘째 이모는 내가 어릴 적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었다.

오랜 세월 만화방을 운영하던 이모 집에서 매년 방학을 보냈었는데 오랜만에 간 이모 집에는 거짓말처럼 만화책 대신 법당이 들어서 있었다. 어릴 적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어안이 벙벙했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새하얀 벽면에 색감이 화려한 무속 탱화들이 줄지어 걸려있고 남자아기의 파란 색동 한복과 한과를 비롯한 여러 과자가 수북이 법당 위에 올려져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촛불과 온 방에 스민 향냄새는 내가 애정하던 이모 집을 더더욱 낯설게 만들었다. 모름지기 신에게 바치는 과일은 가장 좋은 것을 쓰기 마련인데 이모가 굿을 하면 엄마는 굿상 차리는 일을 도왔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돼지갈비처럼 엄마는 온갖 과일과 같이 퇴근했다. 먹고 또 먹어도 줄지 않는 과일은 사시사철 냉장고를 점령했고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과일과 거리 두기를 했다. 아이가 태어나서야 내 돈으로 과일을 사봤지. 내가 먹고자 산적은 아무리 기억을 쥐어짜봐도 없는 것 같다. 그런 내가 과일 쇼핑몰이라니!!
 



친구와 둘이서 정신없이 박스를 접고 각을 잡아 착착 벽면에 가지런히 쌓다 보니 어느새 박스 더미는 내 키를 훌쩍 뛰어넘었다. 아. 뿌듯하다. 깔끔하게 정돈된 모든 것들은 내 마음에 안식을 가져다준다.      


“식사 하십쇼.”     


배꼽시계가 째깍거리는 오후 열두 시가 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띠동갑 남자 직원의 목소리!

오늘의 메뉴는 중화요리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나의 최애 볶음밥에 군만두도 황송한데 탕수육이라니. 국밥 파뤼에 이은 중식 파뤼. 두 시간 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다.     


“잘 먹겠습니다.”     


난 단무지보단 양파 파인데 입에서 양파 냄새가 가시지 않으니 오늘은 패스해야겠다.

숟가락 포장지를 휘리릭 뜯고 드디어 한술 뜬다. 아직도 따스한 고슬고슬한 밥알이 입안에 퍼지고 역시 기름진 게 입안으로 들어오니 생기가 돈다. 난 원래 탕수육은 찍먹인데 요즘 들어 부먹으로 돌아서고 있다. 달달하고 시큼한 소스를 듬뿍 찍어 탕수육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첫날과 다르게 식사 시간에 휘몰아친 서글픔은 다행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성난 감정의 파도에도 휩쓸리지 않았다. 거두절미하고 지금 이 순간은 신세한탄 보단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행복하다!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볶음밥 중에 단연 일등이다. 이래서 모든 노동은 고귀하다고 하는 걸까. 난 지금 무얼 먹어도 행복할 것이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란 말을 좋아하는데 오늘 오후의 행복도 달성했다. 알바하러 와서 행복까지 충전했으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행복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일 층으로 내려오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언니. 오셨어요?”      


친구는 종이컵에 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후루룩 마시며 인사했다. 첫 출근 때 봤던 철사장 언니였다.      


“안녕하세요?”      


나도 친구 따라 아래위 8개의 치아를 보이며 철사장 언니에게 미스코리아 미소를 선보였다. 이거 쑥스럽구먼. 하마터면 오늘도 내 인위적인 모습에 현타가 올 뻔했지만 잘 지나갔다.

철사장 언니 옆엔 짧은 커트 머리에 검은 모자를 쓴 처음 보는 언니도 함께 있었다.     


“어? 또 만나네?”      


철사장 언니 역시 8개의 치아를 보이며 내게 인사를 건넸고 그 순간 낯익은 소음이 들려왔다.

쿵. 쿵. 쿵. 쿵. 띠동갑 남자 직원은 그때 봤을 때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속도로 철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저러다 좀 있으면 이 층에서 한 번에 일 층으로 뛰어내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자 여기 송장 드릴게요!”   


오늘도 역시 첫 주자는 참외다. 그래도 오늘 운이 좋다. 띠동갑 남자 직원은 우리에게 1킬로 송장을 부여했다. 그럼 자동으로 철사장 언니 쪽은 2킬로일 테고.

아무리 혼자만의 고독한 레이스라 해도 철사장 언니 쪽보다 빠르게 택배를 쌀 수 있는 건 분명했다.




나의 고질적 문제점은 쓸데없는 곳에서 발동하는 승부욕이랄까.

같은 시급을 받고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편이다. 뭐든 잘하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된 아주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는 습관 같은 욕구.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내가 개고생을 하게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뭐든 허투루 하긴 싫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나. 과연 젊은 날의 개고생을 견뎌낸 여든의 나는 안녕하실지.

아직은 철사장 언니와 친구에 비하면 실력이 많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배워서 빠른 시일 내에 인간 커터기가 되고야 말겠다. 꿈을 이루고자 지금부터 오늘의 레이스를 시작해 볼까.      


자. 준비하시고 시작!!

1라운드는 내가 원물을 잡았다. 친구는 테이핑, 송장 붙이기, 박스 적재를 맡았다.

친구에 반해 포지션이 빈약해 보여도 원물을 양손에 잡고 요리조리 돌려가며 꼼꼼하게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미간에 잡힌 내천(川) 자도 신경 써야하며 나중 되면 좋은 눈도 침침해져서 루테인을 찾게 되리라.

그 속에 나름 위안을 찾자면 첫 출근 때 보다 확실히 빨라진 내 속도를 체감한다.

친구에게 묻지 않고 척척박사가 따로 없다. 4번 박스를 저울에 올리고 저울을 0으로 맞춘 뒤 요리조리 손목 스냅을 이용하여 원물 상태를 확인하고 1킬로에 맞춰 참외를 박스에 담고 친구에게 패스!

요렇게 수백 번을 반복하다 보면 1라운드가 끝나리라. 열 번의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원물 박스는 빠르게 비어 간다. 원물을 선별하는 일보다 더 큰 고난은 팔레트에 산처럼 쌓인 10킬로 참외 박스를 내려 작업대로 옮기는 일이다. 한 번에 적게는 4박스, 많게는 10박스도 내려야 하는데 내가 살면서 10킬로를 애 말고 들어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체감상으론 10킬로를 훌쩍 넘을 것만 같다. 내 새끼는 사랑으로 번쩍 들어 올린다지만 참외는 아무리 사랑하려 애써도 쉽지 않다. 박스에 감긴 노끈을 잡아 들어 보기도 하고 알 수 없는 기합을 넣으며 들어보기도 한다. 이쯤 되면 나 자신에게 미안해서라도 요령이란 게 생겨야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도 허리를 몇 번이나 삐끗했다. 오른쪽 종아리부터 서서히 당겨오는 것을 보아하니 오늘 밤엔 딸아이가 싫어하는 파스 냄새를 풀풀 풍기며 잠자리에 들겠구나. 갓생을 살기 위한 현생의 희생이 나날이 늘고 있다. 정신없이 원물을 잡다 보니 어느새 한 팔레트를 완성했다. 4번 박스 여섯 개씩. 네 줄 해서 열 번을 쌓아 올렸으니 총 240개! 아. 드디어 치열했던 1라운드가 끝이 났다.

친구와 포지션을 바꿔 2라운드에 돌입했다. 아까보다 할 일이 세배가 늘었지만 긴장은 금물!!

친구가 박스를 토스해 주면 빨간 신선 테이프로 테이핑을 하고 송장을 붙인다.

오늘에서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은 내가 송장을 왼손으로 붙인다는 것이다. 난 양손잡이였다.

왼손잡이가 유전인지 아닌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지만 그래도 왼손잡이의 딸아이와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다.

확실히 첫 출근 때 보단 한층 더 성장한 느낌이 든다. 아이의 성장에만 온 신경을 썼지. 서른여덟의 성장을 누가 신경 쓴단 말인가.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서른여덟의 나를 신경 써 보기로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