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사람들은 인생의 한 페이지를
고이 간직하며 살아간다.
얼마 전 배우자를 잃은 중년의 남자는 한참 눈물짓다 과거의 기억에 활짝 웃어 보였다.
국민학교 시절 응원단장이었던 남자의 손동작 하나에 전교생이 일어났다 앉았다 파도를 쳤노라고. 그 시절 남자의 손끝 하나로 온 동네 축제였던 가을 운동회를 제패했다며 그때로 돌아간 듯 개구지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남자의 웃는 얼굴이 어색해 한참 들여다보니 죽은 사람에겐 잠시 미안했다가 남겨진 사람에겐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 사람들은 인생의 한 페이지를 고이 간직하며 살아간다.
우연히 38년 만에 내가 양손잡이란 걸 자각하고 신기한 마음에 왼손으로 열심히 송장을 붙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드라마에서 아이를 낳으면 모든 부모는 자기 자신이 삭제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했다. 나 역시 한 아이의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고 나 자신보다 아이를 바라보며 살고 있다. 사랑을 정의하자면 아이 이름 석 자로 충분하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사랑과 내가 가진 건 간이든 쓸개든 모조리 다 떼 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 그래서인지 사회와의 단절은 그동안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8년의 공백을 깨고 사회 초년생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아니 시급 만 원의 알바생이 되었지만 단언컨대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 인생의 멋진 한 페이지를 채운 것이라 자부한다.
다만 사회와의 재회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아 좀 겁이 나긴 해도 차차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는다.
아이가 아직 어린 탓에 수많은 제약에 부딪혀 일자리 찾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는데 이렇게 친구 덕에 알바를 하게 될 줄이야. 없는 힘도 짜내서 잘하는 모습을 꼭 보여 주리라.
내 MBTI가 J인 만큼 일을 할 때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곤 한다. 그렇게 해야 버벅대지 않고 보다 능률을 높여 일할 수 있다. 간혹 머릿속의 시뮬레이션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기도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단 백배 낫다. 제발 과부하만 걸리지 말아라.
친구가 원물을 넣은 박스를 토스해 주면 단단하게 테이핑 후 송장을 붙이고 적재. 혼자만의 레이스고 나발이고 이제는 승부가 중요치 않다. 친구의 빠른 속도를 다 쳐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일단 테이핑을 할 때 커터기에 붙은 테이프 끝을 왼손으로 잡고 박스 왼편에 붙인 후 왼손은 고정한 채 오른손으로 커터기를 당기며 테이핑 하고 마지막에 커터기 끝을 하늘로 향하게 하여 테이프를 깔끔하게 컷팅한다. 그러고 나서 오른손으로 송장을 잡고 송장 대각선 끝을 왼손 엄지와 검지로 뜯어내 박스에 붙인 후 위아래로 훑어 준다. 그리고 적재. 오케이! 시뮬레이션 완료! 슬슬 속도를 내볼까.
친구와 포지션을 바꿔 내가 테이핑을 하고 송장을 친다. 박스를 접을 때도 느꼈지만 내 테이핑 실력이 첫 출근날보다 상당히 빨라졌다. 오늘따라 송장도 잘 떼어지는 것 같다. 까치발 신공을 되살려 4번 박스 세 개를 줄지어 들고 팔레트에 빠르게 적재한다. 설렁설렁 따윈 내 사전에 없다. 분신술의 존재를 믿고 싶을 만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쌕쌕 숨이 가빠오더니 얼굴의 열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거울을 안 봐도 뻔할 뻔 자다. 지금의 난 분명 빨간 원숭이가 되었을 테다. 더위를 느끼면 나는 곧장 더위의 강도를 그대로 표출한다. 그것도 가장 잘 보이는 얼굴로다가. 어릴 적 체육 시간만 되면 곤욕이 따로 없었다. 운동장 한 바퀴와 맞바꾼 빨갛다 못해 뻘건 내 얼굴에 하이에나들이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결코 물러설 수 없기에 내 안에 탑재된 사나움을 몽땅 끄집어내 날 놀리는 남자아이들과 날마다 한판 뜨던 초등시절을 거쳐 풋풋한 스무 살 첫 데이트 때도 남자 친구가 유명한 벚꽃 로드로 날 안내 했지만 생각보다 더운 날씨에 얼굴이 빨개질까 두려워 분홍빛으로 눈부시던 그날의 데이트를 망친 기억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친다.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고 놀라지만 않는다면 이젠 상관없다. 예쁘게 보일 사람도 그럴 상황도 아니다. 난 지금 박스를 하나라도 더 적재해서 대표님에게 눈도장을 찍고 친구처럼 고정 알바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물론 맛있는 밥도 먹었으니 밥값은 톡톡히 하고 집에 가야 한다.
손이 풀린 걸까. 친구는 좀 전보다 빠른 속도로 내게 박스를 토스했다. 나보다 십 센티가량 큰 친구는 10킬로나 되는 원물 박스를 척척 잘도 들어 올린다. 나보다 더 참외를 사랑하는 걸까. 참외를 선별하는 속도도 상당하다. 난 1라운드 때 까마득한 정신에 원물 빈 박스를 죄다 뒤로 던져 버렸는데 친구는 착착 잘도 쌓아 정리한다. 아 저렇게 하면 다시 정리하지 않아도 되니 두 번 일할 필요가 없구나. 친구가 차곡차곡 쌓은 빈 박스를 여섯 개씩 들고 밖으로 나가 버린다. 박스 하나에 1.2킬로 정도 되니 7킬로가 훌쩍 넘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쓰러지지 않게 중심을 잡고 걷기가 쉽지 않다. 팔이고 다리고 안 후들거리는 게 없다. 무슨 빈 박스 버리는 것도 이렇게 힘든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친구가 토스해 준 박스가 작업대 위에 줄지어 밀려 있다. 후다닥 뛰어가서 테이핑을 하고 송장을 붙이고 적재를 하다 보니 오늘도 역시 멘털이 탈탈 털리고 말았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푸르른 봄의 정취를 만끽하며 온갖 똥폼은 다 잡고 출근했는데. 와. 오월의 더위로 사람이 죽을 수 있겠단 생각도 잠시 해본다. 저 대가리만 큰 선풍기는 제 역할을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저 윙윙대는 소리도 어찌나 큰지 좀 전부터 내 머리가 빙빙 돌기 시작한 건 아마 저 대가리 때문이 틀림없다. 아. 너. 무. 너. 무. 힘. 들. 다. 쉬. 고. 싶. 다.
시계 볼 겨를도 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덧 쉬는 시간까지 10분 남았다. 10분만 버티면 10분을 쉴 수 있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 정신없는 고행의 끝에 드디어 시곗바늘은 오후 세 시를 가리켰다.
“잠시 끊었다 갈게요.”
건너편 철사장 언니가 큰소리로 외쳤다. 언니 얼굴도 나만큼 지쳐 보였다.
“잠시만요. 저희 얼마 안 남아서 이 팔레트만 빼고 쉴게요.”
뭐라고 친구야?? 잠시 세상이 무너지는 걸 경험했다. 지금껏 9단 하고 박스 세 개를 올렸으니 10단을 채우려면 아직 21개를 더 싸야 한다. 하자면 해야지! 친구는 빠르게 원물을 토스하고 난 탈탈 털린 멘털을 겨우 부여잡고 다시 힘을 내본다. 하다 보니 친구와의 합이 나쁘지 않다. 점점 손발이 맞아가는 기분이다. 고난 속에 피어나는 전우애랄까. 그래. 빨리 해치우고 쉬자! 드디어 한 팔레트를 완성하고 시원한 물 한잔을 들이켰다. 오늘 물을 몇 잔 마셨는지 모른다. 족히 3리터는 마셨을 테다. 더 소름 끼치는 건 그렇게 물을 많이 마셨는데도 화장실 한 번 안 갔다는 사실. 그만큼 땀을 흘렸단 거겠지.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들고 겨우 자리에 앉았다. 핸드폰을 꺼내 이것저것 확인하다 보니 잉? 벌써 10분이 지났네? 말도 안 돼!! 내가 시간을 착각했나? 이렇게 쏜살같이 10분이 지나갈 수가 있다니.
쿵. 쿵. 쿵. 쿵. 사방에 울리는 철계단 소리만으로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오늘 송장은 더 이상 없어서 있는 것만 하시고 퇴근하시면 됩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송장은 서른 장 남짓. 오늘도 택배 500개를 싸고 퇴근이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지만 이만큼 상쾌할 수 없다. 작업장 청소를 끝내고 가방을 가지러 이 층 사무실로 향했다. 쿵. 쿵. 쿵. 쿵 아무리 사뿐히 철계단을 밟아도 소란하기 그지없다.
똑. 똑. 똑
“실례합니다. 가방 좀 가지고 가겠습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일하기는 어떠세요?”
"전 재미있어요."
“다행입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대표님과 짧은 대화를 끝으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섯 시간의 알바가 드디어 끝이 났다.
가만 보자. 그런데 내일 뵙자니?
혹시 나... 고. 정. 알. 바. 된. 거.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