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끝의 성벽

​‘응답 없음’으로 멈춰버린 짝사랑의 기억

by 유열

​대학교 캠퍼스를 전동휠체어로 누비던 그 시절, 나는 지금처럼 고심해서 문장을 짓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무거운 전공 서적을 가방에 매달고 강의실 문턱을 부지런히 오가던 평범한 대학생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유독 좋아하는 그 사람 앞에서만큼은 내 모든 감각이 제 기능을 상실하곤 했다.
​가끔 과실이나 카페에서 내가 빨대를 찾고 있으면, 그 애는 어떻게 알았는지 슬며시 다가와 빨대를 챙겨주곤 했다.
함께 밥을 먹을 때면 서툰 내 손길이 못내 마음 쓰였는지, 직접 숟가락을 들어 밥을 떠먹여주기도 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을 그 찰나에 나는 매번 여지없이 고장이 나버렸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밥알의 온기보다 얼굴로 몰리는 열기가 더 뜨거웠고, 내 뇌는 마치 과부하 걸린 기계처럼 ‘응답 없음’ 상태로 멈춰버렸다.
내게는 그 사소한 순간조차 온 세상이 정지하는 거대한 우주적 사건이었다.
​복잡한 캠퍼스 길을 전동휠체어로 요리조리 찾아가는 일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겨우 몇 센티미터 남짓한 스마트폰 자판 위에서 그 애에게 닿을 길을 찾는 법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나를 주저하게 만든 건 내 무릎 끝에서부터 차오른 장애라는 이름의 성벽이었다.
평소에는 무던하게 받아들였던 내 모습이 그 애를 마음에 품기 시작하자 넘기 힘든 거대한 요새처럼 느껴졌다.
내가 다가가는 일이 그 사람에게는 혹시나 무거운 짐이 되지 않을까, 그 다정한 배려에 내가 너무 큰 기대를 거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늘 나보다 먼저 성문을 굳게 닫아걸곤 했다.
​결국 나는 끝내 그 마음을 성벽 밖으로 꺼내놓지 못했다.
거절당한 뒤의 감당할 수 없는 상처가 두려워 전송 버튼 대신 깊은 침묵을 선택했다. 하지만 내 침묵이 길어지는 동안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머지않아 그 애의 곁에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가 생겼다.
다정하게 그 애의 손을 잡고 걷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내뱉지 못한 수만 가지 문장들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남들보다 느린 나의 바퀴처럼, 그 시절의 사랑도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그저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을 뿐이다.
비록 그 애의 손을 잡지는 못했지만, 상대를 위해 스스로를 멈춰 세웠던 그 서툰 진심만큼은 가짜가 아니었다.
사랑은 때로 다가가는 발걸음보다, 상대의 평온을 위해 기꺼이 멈춰 서는 뒷모습으로 완성되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그 지독한 ‘고장’의 시간들을 통과하며 배웠다.
그때의 빈자리를 채웠던 무력한 침묵들은 이제 내 문장 속에 스며들어 가장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기다림의 무게를 아는 사람만이 가장 선명한 문장으로 다가갈 수 있음을, 나는 이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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