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려 세운 가시가 소중한 사람들을 찌르고 있었다
겉으로는 늘 밝았다. 장애가 부끄럽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 밝음은 내면의 단단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깨지기 쉬운 자존감을 감추기 위한 두꺼운 포장지였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내 자존감은 사실 바닥을 치고 있었고, 나는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며 타인에게 날을 세웠다.
과거의 나는 "나 이것까지 할 수 있어요"라는 거짓말로 나를 부풀리기 바빴다. 지하철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내가 장애가 있어서 신기하게 보나?' 하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 대학교 동기들이 건네는 "유열아, 뭐 도와줄까?"라는 친절은 순수한 배려가 아닌, 나를 동정하는 '위선'으로 들려 마음을 뒤틀리게 했다. 그 예민함의 화살은 늘 가장 가까운 고등학교 친구들과 대학 친구들에게 향했다.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믿었던 적이 있다. 밥을 먹여주는 친구에게 "이거 하나 제대로 못 먹이냐"며 모질게 굴었고, 나를 빼두고 모임이 생기면 서운함을 참지 못해 이기적으로 굴었다. 결국 대학 친구들은 나를 멀리했고, 고등학교 친구들은 나를 돕는 일에 지쳐갔다. 나의 낮은 자존감이 소중한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변화는 뜻밖의 장소에서 시작되었다. 재택근무로 여유가 생긴 어느 날, 무작정 운동을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담했다. 여러 헬스장에서 "장애가 있어 위험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할 때마다 '역시 나는 안 되는구나' 싶어 다시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다 마침내 한 곳에서 "당연히 되죠, 오세요!"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곳에서의 PT 수업은 단순히 근육을 키우는 시간이 아니었다. 트레이너 선생님은 내가 작은 동작 하나를 해낼 때마다 "잘한다", "거봐요, 할 수 있잖아요"라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따뜻한 긍정의 말들이 내 마음의 근육을 조금씩 채우기 시작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혼자 밥 먹는 연습을 시작했고, 지하철 안의 시선도 더는 나를 찌르는 가시로 느껴지지 않았다.
자존감이 회복되자 비로소 과거의 내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허세를 부리며 했던 거짓말들, 친구들에게 부렸던 못된 심술들이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이제는 친구들과 식사할 때 스스로 먹으려 노력한다. 그런 나를 보며 친구들은 여전히 "이건 국물이니까 도와줄게"라며 손을 내밀어 준다.
이제 나는 그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친구들의 의무가 아니라, 나를 향한 깊은 '배려'이자 '사랑'임을 알기 때문이다. 표현은 서툴러 다 전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내 마음속엔 더 이상 예민한 가시 대신 묵직한 고마움이 자리 잡고 있다. 운동이 내 몸을 바꾼 것처럼, 이제는 그 단단해진 마음으로 친구들의 배려에 보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