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방의 기록

보이되 비어 보이게

by 낙화유수

안개가 계단참을 타고 내려왔다. 옥상에서 사라진 조준선의 느낌이 목 뒤에 아직 미지근 하다는 느낌이었다. 문턱 앞에서 잠깐 멈추고 손잡이를 힘주어 눌렀다. 방 안은 고요했다. 나는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제자리에 놓았다. 커튼은 반쯤, 불은 끄고, 빈 컵은 창틀로. 탁자 위 종이는 맨 위에.

오늘의 원칙은 간단히 셋만 기억한다.


한 템포 유예, 바로 기록, 사람은 밖에, 증거는 안에.


문틈 아래와 문턱에 가느다란 테이프를 X 모양으로 붙였다. 누가 문을 밀면 가장 먼저 찢길 자리다. 옆에 “상태: 온전”이라고 짧게 적어 둔다. 이어서 얇은 알루미늄 호일을 길게 찢어 문틈 안쪽에 세우고, 그 앞에 손거울을 비스듬히 고정했다. 밖에서 들여다보면 방이 비어 보이게 만드는 장치다. 탁자 모서리에 올려 둔 측정기를 켜니 화면에 숫자 하나가 남았다. 조도 8lx. 오늘 쓰는 수치는 이것과 하나 더뿐이다.

봉투와 지도


〈동쪽 회랑〉복사본을 펼쳤다. 지도 위 붉은 원은 여전히 급하게 그려져있고, 노트의 빈 줄은 고집스럽게 비어 있었다. 흔적은 있는데 언제인지가 없다.


아~~~~~~~~~~


미칠 노릇이다. 나는 연필로 결론을 적는 대신, 손끝으로 종이의 표면을 살폈다. 사진을 빛에 비스듬히 세워 문지르자 종이 속에 눌려 있던 자국이 떠올랐다. 글자 조각과 숫자 몇 개가 엉성하게 섞여 있다. 해석하고 싶은 마음을 잠깐 접는다. 오늘 해야 할 일은 확정이 아니라 기록이다.


문밖에서 아주 낮은 숨소리가 스쳤다. 들숨과 날숨 사이의 간격이 일정하다. 훈련된 호흡.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호일의 각도를 손톱으로 아주 살짝만 바꿨다. 빛이 옆으로 밀려가고, 거울이 한 번 더 굴절시킨다. 문틈으로 점 같은 빛이 들어왔다가 천장과 커튼 주름을 천천히 훑는다. 아마 초소형 카메라일 것이다. 그들이 보는 화면에는 빈 의자와 말라붙은 커피 자국, 정리된 종이만 들어갈 터였다. 사람은 없다. 의도한 그대로다.


잠깐의 정적 뒤에 발소리가 멀어졌다. 복도 끝에서 무전기 소리가 한 번 긁히고, 다시 조용해진다. 나는 그제서야 호일을 접었다. 다음에 같은 각도로 펼칠 수 있게 모서리에 아주 작은 흠집을 하나 남긴다. 도구가 각도를 기억해 주면, 사람은 덜 실수 하는법.

가방에서 얇은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체크리스트로 옮겨 적는다. 수거: 없음. 봉인: 호일 조각, X 표시 사진. 개봉: 보류. 필요한 내용만 짧게. 복잡한 용어 대신 평범한 말로. 기록은 길게 쓰는 게 아니라 다시 꺼내 보기 쉬운 게 중요하다.

— 보이되, 비어 보이게.

창밖 간판이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마음속으로 간격을 셌다. 1.20s. 어제도 그랬다. 변하지 않는 리듬은 안심을 주는데, 안심은 방심과 가깝다. 나는 그 리듬을 오늘의 기준점으로 적어 둔다. 기준이 있어야 변화를 얻을수 있는법.

문턱의 X 표시를 손가락으로 눌러 본다. 접착면이 손끝에 남기는 가벼운 끈적임. 평소와 다르지 않다. 의자 다리는 바닥을 긁지 않도록 몇 밀리미터만 옮기고, 탁자 모서리는 벽에서 손가락 한 마디쯤 떨어뜨렸다. 멀리서 봐도 어색하지 않게. 생활처럼 보이는 상태가 오늘의 목표이다. 오늘은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열지 않는 것도 분명한 행동이니까.


지도 위로 다시 눈을 돌리니, 붉은 원이 빈 칸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빈 칸을 채우지 않고, 내일 확인할 항목을 남긴다. 냄새, 소리, 빛, 바닥 상태. 네 가지면 충분하다.


냄새: 젖은 목재, 오래된 종이, 식은 커피, 합성섬유의 정전기.


소리: 엘리베이터 모터의 낮은 떨림, 골목 배기음의 꼬리.


빛: 간판 깜빡임 1.20s, 조도 8lx 유지 여부.


바닥: 문턱 X 표시의 접착력 변화.


창을 손바닥만큼 열었다가 닫았다. 공기 흐름이 바뀌며 커튼 주름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 내일 다시 오면, 그 작은 차이가 오늘의 시간을 가르쳐 줄 것이다. 종이 모서리에 손등을 대 보니 온기가 줄었다. 충분하다. 오늘은 두 개의 숫자와 짧은 메모만 남긴다.

문을 나서기 전, 방 한가운데에서 빛의 경로를 눈으로 한 번 더 더듬었다. 문틈 → 호일 → 거울 → 벽 → 커튼 → 바닥. 동선의 끝에 나는 없다. 그걸 확인하고 손잡이를 돌렸다. 뒤돌아보지 않고 복도로 나선다. 공기 냄새가 살짝 달랐다. 젖은 목재 냄새가 옅어지고, 금속성 여운이 길게 남는다. 메모장에 한 줄만 덧붙였다.


“금속성 약간 ↑”.


계단으로 내려가다 네 번째 단에서 잠깐 멈췄다. 습관 같은 정지다. 측벽이 유난히 매끈해 보였지만, 굳이 더 보지 않았다. 오늘은 사실만 인지하고 간다. 의미는 내일로 미루는 편이 낫다. 발소리를 줄이고 골목으로 향한다. 골목 끝의 소음이 낮아지고, 도시가 다시 잠깐 편집을 시작한다.

오늘의 문장은 여기까지. 기록은 오래 살아야 한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기록, 다시 봐도 같은 뜻으로 읽히는 기록. 나는 그쪽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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