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따라 한 칸
새벽 공기가 어제보다 가벼웠다. 골목을 돌아 문 앞에 섰다. 어젯밤 붙여 둔 X 표시는 그대로였고 손끝으로 눌러보니 감촉도 변함이 없었다. 문을 열며 먼저 냄새를 확인한다. 젖은 목재는 줄었고 종이 냄새가 조금 더 진해졌다. 오늘의 기준은 두 가지만 적는다. 벽면 13°C, 습도 58%. 숫자는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그동안의 고단한 삶이 익숙함을 선사해 주었기에~~
방은 어제처럼 비어 보였다. 나는 벽을 따라 천천히 돌며 손바닥으로 표면의 미세한 차이를 더듬었다. 북쪽 벽, 석고보드 이음새 부근에서 온기가 아주 약하게 달랐다. 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 아닌가? "
주걱 끝을 이음새에 밀어 넣어 페인트를 손톱만큼만 들어 올리자 “슥” 하는 마찰음과 함께 얇은 봉투가 미끄러져 나왔다. 테이블로 가져와 칼날 대신 손톱으로 모서리를 벌려 조심스럽게 연다. 안에는 흑백 복사본과 얇은 투명 필름이 들어 있었다.
복사본은〈동쪽 회랑〉의 일부였다. 모서리에 흐릿한 서명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필름을 빛 위에 올려 복사본 가장자리에 맞춰 천천히 돌린다. 각도가 맞는 순간 선들이 포개진다. 완전하지 않지만 되돌아왔다고 말할 수도 없는 윤곽들. 이름을 확정하려 들면 길을 잃는다.
지금 필요한 건 방향이다.
나는 연필로 작은 화살표 하나만 남겼다. 필름과 겹친 선이 향하는 쪽, 북서. 어제 적어 둔 골목 바람의 메모와도 겹친다. 더 만지지 않고 메모로 대체한다.
“서명 윤곽 확인. 필름-복사본 일치.”
짧고 분명하게.
체크리스트를 꺼내 오늘의 줄을 채운다.
수거: 투명 필름(봉투·복사본은 원위치)
기록: “서명 윤곽 맞춤”, “벽 13°C / 습도 58%”
다음: “복사본 좌표 ↔ 3화 발자국 지도 대조”
창을 손바닥만큼 열었다 닫자, 커튼 주름이 얕게 방향을 바꾼다. 바닥 그림자도 한 뼘 이동한다. 방은 여전히 평범하다. 의자 다리는 들어서 옮기고, 테이블 모서리는 벽에서 손가락 한 마디 거리로 유지한다. 생활처럼 보이는 상태를 깨지 않는 것, 오늘도 그게 우선이다.
전화가 짧고 굵게 울린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한 줄만 뜬다.
" 바람을 따라! "
애매하지만 충분하다. 환기 방향과 골목의 흐름, 창틀의 흔들림이 같은 쪽을 가리킨다. 화살표 하나를 창 방향에 더한다.
나는 봉투를 다시 북쪽 벽 틈에 그대로 돌려 넣었다. 제자리여야 하는 것들이 있다. 대신 필름만 얇은 노란 봉투에 넣어 지갑 깊은 칸에 눌렀다. 방 한가운데서 오늘의 문장을 한 줄로 남긴다.
“서명은 돌아왔고, 언제는 아직 비어 있다.”
문을 닫자 골목의 리듬이 돌아왔다. 나는 어제와 조금 다른 동선으로 빠져나왔다. 같은 길을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게 내 존재의 흔적을 無로 만든다. 오늘의 결론은 간단하다. 조각은 늘었고, 해석은 아직 이르다. 그래서 기록을 들고나간다.
내일의 문이 조금 더 가볍게 열리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