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이름과 남는 필압
새벽 냄새가 골목을 점령하고 있었다. 민재는 반쯤 내려온 셔터 앞에서 잠시 멈춰, 어제의 잔향이 아직 식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셔터 아래 틈으로 노란 형광등이 불안한 맥박처럼 깜박였고, 담배 연기의 얇은 막이 유리문 안쪽에 눌어붙어 있었다. 문을 밀자 공기가 바뀌었다. 곰팡이와 전열, 오래 묵은 기름, 종이와 잉크의 냄새가 겹겹이 쌓여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계산대 뒤, 박두식이 앉아 있었다. 좁은 어깨, 울퉁불퉁한 손마디, 새까맣게 그을린 손끝. 그의 눈은 처음부터 민재의 가방에 꽂혀 있었다.
“늦었네.” 말이 거칠었다. 오래된 테이프에서 긁히는 소리가 섞여 나오는 듯했다. 민재는 대답 대신 가방을 의자 옆에 내려놓고, 케이스를 꺼내 테이블 위에 밀었다. 은박 포일로 감싼 케이스는 무광으로 빛을 먹어치웠다. 모서리에는 이미 한 번 열린 흉터가 있었다.
“그걸 열었다면,” 두식이 손가락으로 케이스 모서리를 톡 건드렸다. “절차의 반은 건넌 거야. 이름은 아직 비어도, 빈칸은 오래 비워두지 않지.”
“이름이 붙는 순간?”
“누군가는 사라져.” 두식의 말은 단정했다. “빈칸의 대가.”
담배 연기와 라디오 잡음이 얇게 겹쳐 가게가 즉석 심문실로 변한다
두식은 카운터 아래 서랍을 열어 낡은 수첩을 꺼냈다. 종이 결은 습기에 살짝 말려 있었고, 페이지 모서리마다 필압 자국이 칼날처럼 세겨져 있었다. 서로 다른 필체가 겹겹이 얹혀 있었고, 몇몇 줄은 지웠다가 다시 덧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가입 방식의 기록.” 그는 페이지를 천천히 넘겼다. “좌표, 시간 코드, 이니셜. 같은 숫자가 다른 칸에 반복되는 이유—숨기기 위해서야. 마치 도망자가 안전한 은신처로 들어가기 전 추격자를 대비한 입구의 부비트렙이나 대인 지뢰처럼 견고했다. 포일 반사 17도, 그 각도로 비틀면 진짜 위치가 뜬다.”
민재의 머릿속을 철제 난간의 반사와 저수지의 물결이 스쳤다. 밝기와 각도가 바뀌는 순간 보이던, ‘다른’ 자리.
“이걸 본 사람들은 얼마나 되지?”, 어투는 명령 투였다.
“둘 중 하나.” 두식은 담담했다. “이름을 얻거나, 이름을 잃거나. 기록은 남지만 증언은 오래 못 가.”
두식은 한 페이지를 접어 삼각형 표식을 만들었다. 접힌 꼭짓점은 비어 있는 칸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른 줄은 빽빽한데, 그 칸만 공백이었다.
“ 여긴 왜 비워놨습니까? ”
“ 이름이 아직 없어서. ” 두식이 짧게 웃었다. “붙는 순간, 빈칸은 사라지고 사람이 비워지지.”
문 틈으로 금속성 바람이 한 번 스쳤다. 셔터 아래로 들어온 얇은 빛이 바닥 먼지의 결을 가르며 쏟아졌다. 라디오는 잡음을 삼켰다 뱉었다.
“대가 얘길 해야겠군.” 두식이 담배를 비벼 끄며 말을 이었다. “오늘부턴 난 없다. 내 흔적 대신, 네가 이걸 갖고 가.”
그는 수첩을 민재 쪽으로 밀었다. 종이에서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잉크의 냄새보다 먼저 닿는 체온. 민재는 장갑 낀 듯 손끝 감각이 둔해지는 걸 느꼈다.
“두 번 넘게 열지 마라.” 두식의 눈빛이 굳어졌다. “페이지가 바뀐다. 같은 책인데 다른 내용. 그게 그들의 위장 장치다.”
민재가 수첩을 가방 깊숙이 밀어 넣자, 라디오가 짧게 튀었다. 바깥에서 발소리가 문 앞에 와 멈췄다가, 다시 멀어졌다. 두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이별을 대신하고 있었다.
가게를 나서며 민재는 형광등이 마지막으로 깜박이는 보았다. 불이 꺼지자 유리는 바깥 풍경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고, 거울 너머의 가게는 텅 빈 창고처럼 보였다. 존재의 흔적은 냄새와 필압으로만 남아 있었다.
골목 바닥의 물자국이 신발 밑창에 얇게 묻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벼운 금속성 소리가 났다. 그는 수첩의 무게가 케이스의 무게를 바꾸는 걸 느꼈다. 동일한 질량의 다른 무게—증언은 늘 그쪽이었다.
시장 모퉁이를 돌아 나오자 전봇대 위 전선이 새벽바람에 흔들렸다. 흔들림은 작은 진동으로 목 뒤를 긁었다. 민재는 고개를 들었다. 도시의 빛이 꺼지면서, 어둠 속 이미지의 윤곽이 오히려 또렷해졌다.
휴대전화 화면을 켜니 시간 코드가 8분가량 튀어 있었다. “비어 있던 구간.” 머릿속에서 단어가 혼자
더 올랐다. 그 사이 도대체 무엇이 지나갔을까?
그는 셔츠 주머니에 남은 작은 포일 조각을 꺼내 반사각을 잡아 보았다. 17도. 도시의 방향이 살짝 비틀렸다. 간판의 글자가 뒤집히고, 골목의 깊이가 한 치 더 들어가 보였다. 포일 표면의 미세한 결 사이로 지명이 일어섰다가, 다른 지명과 겹쳐졌다.
민재는 수첩을 열고 싶다는 충동이 지나가기를 힘들게 기다렸다.
한 번만 봐라. 두 번 넘게 열면 달라진다.
두식의 목소리가 라디오 잡음처럼 뒷머리 쪽에서 음의 정도만 다른 메이리로 들리는 듯했다.
바람이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어디선가 무전기의 잡음이 아주 작게 일어섰다가 꺼졌다. 그는 허리춤에서 작은 녹음기를 꺼내 확인했다. 방금까지의 대화는 깨끗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재생 바의 길이가, 실제 시간보다 길었다. 프레임이 늘어졌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출구 앞에서 민재는 멈췄다. ‘붙잡는 곳은 이쪽이 아닐 수도 있어.’ 윤의 말이 뒤늦게 번득 떠올랐다.
그는 수첩을 꺼내지 않은 채, 케이스만 다시 확인했다. 봉인은 그대로였다. 들뜸의 기미만 있었다. 미세한 틈.
말을 살리는 건 언제나 그 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