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 말.

by 이유하

무인 계산기가 생긴 뒤로는 사실 일거리가 좀 줄었다.

보기보다 고지식한 탓에 신문물의 편리함을 오랜 시간 미루다가 아이들의 불평이 점점 탑처럼 쌓이자, 나의 편리보다는 전적으로 아이들의 편리를 위해 그 기계를 들였다.

체력은 자신 있어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워야만 하는 일들이 있고, 아이들이 오가는 곳엔 피치 못할 상황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녁 퇴근 시에는 기계의 전원을 끄고 문구점 문을 퇴근 세팅한 후에 집으로 향한다.

‘... 왜..?’

편리도 편의도 다 좋지만, 또 다른 나의 집이고 아이들만큼 공간에도 쉼이 필요하니까.

어떤 장사든 잡음 없이 이어지기는 쉽지 않지만, 그럭저럭 학교 앞 우리 문구점은 감사하게도 천진함이 주를 이루며 귀여운 질서를 잘 지켜오고 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마감을 한 뒤, 물건을 정리하고 재고와 주문 목록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아이들이 내일까지 부탁한 일은 없는지, 소파 사이사이 주머니에서 빠진 물건은 없는지도 꼼꼼히 봐줘야 한다.

그렇게 무인 계산기 점검까지 끝나고 나면!!

즐거운 나의 퇴근 시간.


낮에는 태양이 그렇게 힘자랑을 하더니 집으로 향하는 저녁 바람은 꽤 시원했다.

가게에서 열 걸음 정도 걸으면 빵 가게가 나오는데, 이틀에 한 번 정도 들러서 통밀빵을 사거나 운 좋게 남은 베이글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날도 좋아하는 빵 몇 개와 계산을 마치고 봉지를 들고 나서려는데, 건너편에 반가운 얼굴 하나가 뛰어가는 게 보인다.

‘마라 맛 해랑이!!!’

반가움이 봉지에 든 베이글만큼 부풀어 올라 있는 힘껏 문을 밀었다.


꽝!!!!!

우당탕탕...

...???????

발밑으로 책들이 흩어져 있고 이마가 살짝 지끈거렸다.

책이라면 낯설지는 않다.

이 거리에서 참고서나 문제집, 동화책이 오갈 때, 홀로 시집을 품고 다니던 사람.

살짝 훑어만 봐도 떨어진 책이 열 권은 넘어 보였다.

지난주에는 카트 가득 책을 담고서 길을 건너던 사람.

‘드륵드륵’ 바퀴 소리가 마치 ‘나 집에 가요, 나 집에 가요.’ 말을 거는 듯 느껴졌는데 오늘은 맨손 공법을 택했다가 나를 만나 무너진 것이리라.

무너진 건 책만이 아니었을까.

큰 눈동자 밑으로 그동안 좀처럼 움직임을 보지 못한 입가가 울상이 된다.

잠시 그 모습이 좀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넘어지며 긁힌 건지 팔꿈치가 까져서 살짝 피가 나는 것 같다.

“괜찮으세요????”

옷을 털고 일어나더니 “죄송해요..”라고 말하는 사람.

피가 나는 건 내가 아닌데, 조심성 없이 문을 밀친 건 난데, 이 사람은 뭐가 죄송한 걸까.

까진 팔꿈치가 나를 푹 눌렀고 죄송하다는 그 말이 나를 두 번 눌렀다.

“아니에요. 제가 더 죄송하죠. 아는 사람이 지나가서 급한 마음에 문을 세게 밀었어요. 죄송합니다..

어???? 피가 나는데요?? 도와드릴게요!! 일단 이거 다 들어드리면 될까요?”

당황스러운 말들이 랩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다고 세차게 손을 흔들며 떨어진 책들을 황급히 줍는 그 사람.

몇 가지 그림책이 눈에 들어오고 저건 시집인가..

다행인지 모를 일이지만 우리는 같은 방향의 길을 한참 걸었고 내 팔에는 그녀의 책들이 올려져 있다.

‘아.. 이렇게 나의 꾸준함이 빛을 발하는가.

그동안 무거운 몸을 이기고 또 이기며 출석 도장을 찍은 헬스장에서의 보람이...!!’

두 팔 가득 더해진 의기양양한 나의 표정이 들키지 않았으면..

곁눈질로 그녀의 얼굴을 힐끔힐끔 살폈다.

가로등 불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이는 긴 머리.

일부러 크게 입은 듯한 통이 넓은 정장 바지와 하늘색 반팔 니트.

그리고 바르게 하얀 운동화.

그녀의 분위기와 내 팔 위에 올려진 책들의 접점을 찾느라 바쁜 내 머릿속.

궁금해졌다.

스치기만 하던 사람이, 처음으로 누군가의 책이, 그 책 속의 이야기가.

어느 아파트 정문에 다다르자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혹여 실례가 될까 싶어 목까지 올라온 질문들을 삼키고 책들을 최대한 조심히 그녀에게 건넸다.

주머니 속에 있던 반창고를 꺼냈다.

아까부터 피가 보인 팔꿈치가 자꾸만 신경 쓰여서 걸어오는 내내 주머니 속에 반창고 생각뿐이었다. 아침에 서랍에 있던 걸 챙겨두길 참 잘했다.

“정말 감사해요. 제가 들어도 되는데..”

‘정말’이라는 표현에 멈칫했다.

하루 동안 아이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쏟아져 나오는 말.

‘정말 좋아!’

‘정말 맛있어!’

정말! 정말! 정말!!!

입에서 발음할 때마다 왠지 통통 튕겨 나와 듣는 상대방까지 통통 튀어 오르게 만드는 그 말.

정. 말.

아이들이 내뱉는 그 정말이 얼마의 높이와 울림인지 나는 잘 알기에 그녀가 말하는 감사함이 내겐 정. 말.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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