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오후 내내 학교 정문을 수시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오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정말 나온다면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아니, 사실 고맙다는 말보다 이름 모를 반가움이 먼저일 것 같았다.
오후 네 시가 넘어가고 아이들의 하교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아이들과 짧은 농담을 주고받다가 반대쪽 신호등에서 기다리던 사람을 발견하자 나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높게 올려 묶은 머리에 발목까지 길게 내려온 흰색 원피스.
어김없이 책이 들었을 오른쪽 어깨의 커다란 에코백.
다른 왼손에 쥐어진 또 다른 책 한 권.
물론 여자들의 다채로운 화장법이나 스타일에 따라 달라지는 분위기는 핸드폰만 열어봐도 금방 익히게 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그 사람은 어제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나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원래 나의 계획은, 부담 갖지 않도록 레몬 사탕 몇 개를 건네며 선물 고마웠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잠시 이쪽을 바라보나 싶었는데, 황급히 고개를 돌린 건 그녀가 아닌 나.
갑자기 열이 오르는 것 같다.
에어컨 리모컨을 앞에 두고 애꿎은 서랍만 한참을 뒤적거린다.
바보 같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고 나갔을 땐, 이미 그녀가 사라진 뒤다.
하루의 유일한 접점을 놓쳤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불어날 대로 불어나 퇴근 시간도 잊고 그 후로 한 시간을 훌쩍 붙박이처럼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아침에 올려놓은 시집.
‘이럴 때가 아니지’
간단한 가게 정리 후에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베이글도 생략하고 곧장 집으로 올라가 배고픔도 잊은 채, 양말도 벗지 않고 시집부터 폈다.
몇 장을 뒤적이다가 몇몇 페이지를 오래 만지작거렸다.
‘군함 없어도 책 한 권이면 돼
우리를 멀리 대륙으로 데려다 주지
군마 없어도 한 페이지면 돼
시를 활보하지
이런 횡단이라면 아무리 가난해도 갈 수 있지
통행료 압박도 없고
인간의 영혼을 실을
전차인데 이다지도 검소하다니’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내 삶은 헛된 것이 아니리
내가 한 생명의 아픔을 달랠 수 있다면
혹은 하나의 괴로움을 위로할 수 있다면
혹은 쓰러져 가는 한 마리의 울새를 도와
둥지에 다시 넣어줄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리’
-에밀리 디킨슨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시라는 것은, 어린 시절 철수와 영희가 등장하던 교과서에 함께 실린 벌과 나비에 관한 시.
시험을 위해 시대적 배경과 함께 외우기 바빴던 윤동주 시인을 비롯한 굳센 시인의 마음 몇 편.
감상과는 거리가 먼 기억들.
아침에 마주한 시집의 첫인상은 내게 너무 과분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감히 내가 주는 이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지 부담이 먼저였다.
그래서 오후에 마주치면 가벼이 레몬 사탕 몇 개로 그 부담을 날리고 싶었다.
두고두고 혹시 물어올 감상을 기한 없이 내 몫으로만 끝내고 싶어서.
그런 내 마음을 그녀는 짐작했을까.
바보스러울 나를 이미 예측했을까.
여지도 없이 날아간 듯 그 길 끝으로 모습을 감춘 그녀.
그리고 그런 그녀의 강요한 적 없는 숙제를 집에 오자마자 펼친 나.
하얀 원피스 자락이 자꾸만 눈앞에 서성인다.
서가에 빽빽하게 채워진 그 많은 책 중에 그녀라는 날개를 달고 나에게 온 시집.
그 속에 ‘울새’에서 나는 오래 멈칫거렸다.
‘한 생명의 아픔’에서 ‘하나의 괴로움’까지 그곳에서 걷고 또 걸었다.
무언가가 나를 푹 찌르고 들어왔다.
아팠다.
오랜만에 많이 아팠다.
단 몇 줄의 글이 지난 나의 기억을 사정없이 데려다가 앞에 앉혔다.
그날 처음으로 시라는 것에 나는 밤새 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