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더위가 가고 열어둔 문으로 가을바람이 머물다 간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서 정수기 구석구석을 닦고 종이컵을 채우며 다음 점검 일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사장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화요일마다 맡은 업무 때문에 한 시간 늦게 퇴근하시는 주호 어머님.
두 달 전쯤인가.
화요일만 되면 6시가 넘도록 소파에 앉아서 만화책을 읽던 주호.
엄마가 늦게 온다는 주호의 말에 함께 카드 게임을 해준 일이 계속되어 지난달부터는 아예 화요일 퇴근 시간을 8시로 바꾸게 되었다.
부탁도 부담도 아닌 내가 좋아서 시작한 연장 업무였다.
사실 업무라는 표현은 좀 그렇다.
내가 더 화요일을 기다렸고 그 시간을 누구보다 더 즐기기 시작했으니까.
가볍게 시작한 일이 또 다른 주호들로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하면서 화요일 오후만 되면 문구점이 북적거렸다.
그래서 화요일 아침이면 주호 어머니께서 꼭 출근길에 문구점을 들러 아이들 간식거리를 주고 가신다.
사정이 생기는 날엔 오후에 주호 손에라도 꼭 챙겨 주시는 고마운 마음.
“내가 새벽에 이거 쪘는데 엄청 달고 맛있어요.
그 맨날 닭가슴살만 데워 먹지 말고요~~
애들만 주지 말고 사장님도 꼭 드세요. 내가 저녁에 와서 주호한테 물어볼 거니까!”
봉지 가득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가 두 손 무겁게 들어있다.
옥수수로도 충분한데 봉지 옆에 포도 주스까지 두통 세워두는 주호 어머님.
“아이고, 어머님~ 저번에 주신 두유도 아직 냉장고에 남았는걸요.
매번 이렇게 챙겨 주시면 제가 죄송해서 어떡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호 어머님은 문을 열고 멀리서 오는 버스를 향해 달려가신다.
옥수수에 묻은 어머님의 사랑으로 아침부터 문구점 안이 후끈후끈 데워진 것 같다.
오전 일과를 차근차근 마무리하고 아이들과 함께 옥수수를 나눠 먹을 생각에 하교 시간이 기다려졌다.
첫 옥수수의 주인공은 누가 될까 귀여운 얼굴들을 떠올려 본다.
어느덧 시계가 2시를 가리키자 해랑이가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에 얼굴을 못 봐서 궁금하던 참이었다.
한 손에는 신발주머니, 다른 한 손에는 종이처럼 보이는 뭔가를 들고 있다.
신호가 켜지기 무섭게 문구점으로 쏜살같이 들어오는 녀석.
“안녕하세요 오 오오!!!”
해랑이의 목소리가 문구점 안을 가득 채운다.
“해랑아, 아침에 늦잠 잤니??”
“아뇨! 오늘은 도서관에 가느라 문구점에 못 들렀어요!
정말 중요한 일이 있었거든요.”
???
도서관도 궁금하고 정. 말 중요한 일도 알고 싶어진다.
내가 아는 그 정. 말과 관련이 있는지도.
“중요한 일???”
해랑이는 씩 웃더니 아까부터 들고 있던 종이를 책상 위에 자신 있게 올려놓는다.
“이거 때문에요!”
녀석이 올려놓은 종이를 펼치자,
‘사과는 맛있다
나는 수박도 좋고 딸기도 좋지만
사과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사다 주신 사과
사랑이 담긴 사과
엄마가 매일 깎아주는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사랑의 사과’
“와, 해랑아. 이거 네가 쓴 거야?”
“네! 사서선생님은 맛있는 젤리가 많아요. 젤리를 시랑 바꿔 주시거든요.”
“..?? 젤리를 시랑 바꿔?”
“그냥은 절대 안 주시고 시를 써오면 젤리를 주세요. 그렇다고 대충 쓰면 안 돼요. 태성이는 바퀴벌레라고 제목만 쓰고 ‘바퀴벌레는 무섭다’라고만 썼더니 그걸로는 안된데요.”
..... 풉
“그럼 어떻게 해야 태성이도 젤리를 받을 수 있을까?”
“음..
바퀴벌레를 언제 봤는지, 어디가 무서운지, 그래서 마음이 어땠는지 적어보라고 하셨어요. 무언가를 떠올릴 때는 하나만 생각하지 말고 두 개, 세 개, 네 개..
어쨌든 오래 생각해 보래요.”
‘아...’
그 순간 침대 맡에 두었던 시집이 떠올랐다.
몇 번이나 읽었던 페이지와 제목만 보고 건너뛴 페이지가 있는 시집.
차마 다 읽지 못한, 혼자서 끙끙거리는 나만의 숙제.
생각해 보니 나는 무섭다는 한마디도 그녀에게 전하지 못한 채 여름을 보냈다.
그동안 그녀가 퇴근할 시간이 되면 문구점 가장 안쪽으로 나를 숨겼다.
그런다고 숨겨질 덩치는 아니었지만, 잘 꽂혀있는 연습장을 괜히 넣고 빼고 하며 건너편 풍경을 힐끗거렸다.
나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항상 건너오는 그녀를 바라보면 될 일이었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분위기의 그녀를 보는 일은 즐거웠다.
셔츠에 스카프를 두르기도 했고 어떤 날은 워커에 가죽 재킷을 입기도 했다.
그런 날엔 그녀의 손에 시집이 아닌 기타를 들게 하고 어느 재즈바를 배경으로 그려 넣기도 했다.
그것 또한 어색하지 않아서 웃음이 났다.
아마 나는 꽤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문구점 유리창은 액자가 되고 그 속에 매일 다른 모습의 그녀를 찍어 간직하는 일이.
해랑이를 앞에 두고 그간의 기억들을 떠올리다가 번뜩.
“해랑아! 잠깐만!!!”
종이를 다시 가방 속에 집어넣던 해랑이가 큰 눈으로 빤히 나를 바라본다.
책상 위에 포스트잇을 떼어 떠오르는 생각들이 날아가기 전에 빠르게 적었다.
그럴 생각도 아니었다.
계획도 없었다.
다 적은 포스트잇을 두 번 접어 해랑이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사서 선생님께 전해줄래?
음.. 아저씨도 시 배우고 싶거든. 하하”
처음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흥미로운 미션을 받은 것처럼,
“좋아요!! 그럼 사장님도 한 가지를 골라봐요. 그리고 오래 생각해야 해요!”
동지가 생겼다는 듯 해랑이는 어깨를 들썩거렸고 동전 몇 개를 올려놓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다시 혼자 남겨진 문구점에서 방금 일어난 일을 재생해 보다가 포스트잇을 떼어낸 부분에서 멈췄다.
손끝에 볼펜이 쥐어지고 이내 종이를 채우는 글자들.
‘울새들을 오래 생각했고
귤은 말씀대로 달았습니다.
읽는 것보다 듣는 걸 좋아합니다.’
몇 번이고 돌려봐도 시라면 시일까 하는 나의 글이 문밖으로 달려 나간다.
쪽지가 떨어졌기를, 꿈이었기를.
그날 밤 몇 번이고 이불킥을 하며 괴로워했지만,
이미 나를 떠난 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