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은 아쉬움이 많은가 보다.
여전히 발걸음을 못 떼고 이른 아침부터 더위를 발산하고 있으니.
카페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포장하고 나오는데 지우가 문구점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표정이 밝아 보였다.
“지우 일찍 나왔네? 뭐 필요한 거 있니?”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는 지우에게 반갑게 말을 걸어본다.
“사장님은 긴 팔 덥지 않아요?? 지금 34도예요!!!”
티셔츠 위에 걸친 체크 남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서 자신의 핸드폰 일기예보를 내게 보여주는 지우.
“아,. 하하. 음.. 그게.. 나는.. 에어컨을 계속 틀거라.. 하하..”
어색한 내 웃음에 더는 대답할 말이 없었는지 나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는 녀석.
사실 이번 여름은 어찌나 더운지 꼬박꼬박 일찍 일어나 제 일을 해내는 태양이 대단할 정도였다.
뜨거운 태양에 도로 위에 깨트린 달걀이 프라이가 되었다는 기사도 본 것 같다.
하지만 지우의 걱정과 달리 여름날의 뜨거움 정도는 내게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었다.
“사장님, 그 사서선생님 봤는데요.”
‘... 어?... 아.....‘
내가 물론 매사에 본능이 앞서는 편이긴 하지만 아이들에게만큼은 과묵하고 듬직한 문구점 주인이 되고 싶었다.
때론 신비주의에 싸여 궁금증을 갖게 하는.
그런데 이게 뭐람.
다 틀렸다.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다.
전적으로 시 탓이다.
인생 35년 차.
처음으로 시를 만나 탈탈 털리는 나를 지켜보는 중이다.
“사서선생님? 갑자기 그 얘기는 왜??”
최대한 건조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는데, 지우는 이미 다 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예뻐요. 그리고 남자친구는 없는 거 같아요.”
....?!?!?!?!?
“아! 그리고 거의 매일 여기 아파트 뒤에 공원에서 뛴다고 했어요.”
계산이 끝난 물건을 집어서 재빠르게 문을 열고 나가는 지우.
타이밍 좋게 켜진 신호등에 한 번을 돌아보지 않고 교문 안으로 뛰어간다.
여전히 순수한 아이에게 이른 아침부터 귀한 애정을 선물 받은 느낌.
시간은 흐르고 흘러 4시를 향해 가고 주머니에서 그녀의 쪽지를 꺼내 다시 읽었다.
그녀의 걸음에 맞춰 문을 열고 인사를 나누는 상상을 여러 번 했었다.
어색하지 않게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거울 앞에서 짓기도 했다.
하지만 작은 용기는 이제 접어두고 더 큰 용기를 내야 할 것 같았다.
해가 지고 가로등이 길가를 떠듬떠듬 밝히는 시간.
집으로 돌아와 가벼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그녀와 마주칠 기대감을 안고 공원으로 향했다.
서늘한 날씨에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로 공원은 활기가 흘렀다.
머리에 모자를 더 푹 눌러썼다.
이 시간만큼은 온전히 집중하고 싶었다.
눈치 없이 바쁜 눈동자를 발 보폭과 맞추려 애썼다.
한참을 그렇게 사람들 사이로 걷고 있는데 저 멀리 부푼 기대감을 안도감으로 바꿔 줄 그녀가 보였다.
지우의 말만 믿고 무작정 나오긴 했지만, 막상 그녀가 보이자 누가 나를 당기는 것처럼 망설임이 앞섰다.
긴 머리를 질끈 묶고 운동복을 갖춰 입은 그녀에게 또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달리는 자세에서 오랜 시간 성실히 체력을 다져온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다.
여리게만 보았던 낮의 모습에 좀 더 단단한 무언가가 더해져 있었다.
몇 가지의 모습을 간직하고 사는 걸까.
품은 게 많아서 시인이 되는 걸까 잠시 생각했다.
나를 과연 알아볼까, 방해가 되진 않을까 고민하며 그녀를 쫓아 한참을 뒤떨어져 달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의 걸음이 멈추고 힘이 드는지 터덜터덜 몸을 떨구기 시작한다.
그 시간을 좀 더 바라보다가 간격을 조금씩 좁혀 마침내 곁에 다다른다.
“안녕하세요.”
땀이 방울방울 맺힌 이마 밑으로 까맣고 큰 눈이 나를 향해 꽂힌다.
“운동하세요? 혹시 방해될까 아까부터 인사하고 싶었는데 참았어요.”
‘당신이 왜 여기서..’라고 그녀의 눈이 말을 걸었다.
그날 가로등 밑에서 마주한 그녀의 얼굴.
달리기 탓에 양쪽 볼이 발그레한 얼굴.
햇살 밑의 그녀를 멀리서 찍어 간직한 모습과는 또 다르게 그 저녁의 얼굴이 내 안의 앨범 한 곳에 저장된다.
“헉..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깜짝 놀랐어요.”
이런 만남을 조금도 예측하지 못한 것처럼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급히 닦아내는 그녀.
부끄러워하는 거 같기도 하고 갈 곳 잃은 걸음에 살짝 무릎이 꺾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순간 나는 조금 성급했던 건 아닐지 생각했지만 준비해 온 큰 용기의 정점을 찍어보기로 했다.
“해랑이에게 주신 글은 잘 받았어요. 귀엽고 기특한 녀석이에요.
그리고.. 저번에 주신 시집은 외롭지 않게 잘 있습니다.”
잘못 봤을까.
발그레한 볼이 위로 한껏 올려진다.
“학교 도서관에 있다 보면 기특한 녀석들을 더 자주 만나요. 위로하고 응원을 주려 시작한 일인데 제가 더 위로받고 힘을 받는 날이 많아요.”
마음을 헤아리기엔 역부족이라 생각한 시인이 생각보다 나와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바라보는 방향 또한 같을지도 모른다는 자신감 같은 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를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도 비슷해요. 그 웃음을 보고 있으면 무장해제가 되잖아요.
어떻게든.. 그 웃음을 지켜주고 싶단 생각이 들죠...”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선쯤 닿아 있을까.
크고 까만 눈동자가 다시 나를 올려다본다.
나조차 깊이 넣어둔 사연을 짐작하는 눈빛이랄까.
“듣는 걸 좋아하신다더니 아이들이 문구점에 몰려 있는 이유가 있었네요.
제가 아이라도 사장님께 자꾸 말을 걸고 싶을 거 같아요.”
끝에 말이 점점 작아져 바람에 흩날렸다.
우리는 근처 편의점에 들어갔다.
나는 단백질 셰이크 두 개를 골랐고, 옆 칸에서 그녀는 생수 두 개와 맥주 두 캔을 꺼낸다. 계산하겠다는 내 말을 앞지르더니 직원에게 카드를 내미는 그녀.
달리기로 다져진 스피드인가 싶어 살짝 웃음이 났다.
그렇게 우리는 달빛 아래를 걸었다.
그녀는 내게 생수를, 나는 그녀에게 단백질 셰이크를 건넸다.
“맥주는 못 드려요.” 하고 그녀가 하하 웃는다.
아이들 앞에서 지었던 웃음이 바로 이거였을까.
위트 없는 상대도 포용할 여유가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힘들게 뛰셨는데 맥주 드세요?”
“그러려고 운동하는걸요. 큭.. 이거 다 못 마셔요. 술은 약하거든요.”
내 눈에도 그래 보였다.
그녀에게는 커다란 분홍빛의 솜사탕이나 빙글빙글 잘 돌려진 콘 아이스크림이 더 잘 어울렸다.
여러모로 연약해 보였지만 언제 강해야 하는지를 알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맥주를 들고 웃는 그녀의 모습도 어색하지 않고 반가웠다.
꾸밈없이 포장하지 않고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이.
걷다 발견한 벤치에 우리 둘은 나란히 앉았다.
가만히 물을 마시고 밤하늘을 보고, 지나가는 차들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이렇게 함께하는 건 오늘이 분명 처음이었다.
오며 가며 마주하기보다 스쳐 지나간 시간이 더 많았던 우리였으니까.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그녀와의 정적이 불편하지 않았다.
잠깐씩 쌓이는 시간만큼 그녀를 향한 나의 감정에 익숙해진 탓이었을까.
“시는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밤공기를 뚫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음.. 정확히는 뭔가 읽는 걸 좋아했는데 오래 잊고 지냈어요. 많이 좋아하던 것들을.”
“그럼.. 사서 일을 오래 하신 건 아닌가 봐요. 저도 올해 처음 뵌 거 같아서.”
“네, 맞아요. 원래는 다른 일을 했었어요.
그저 하루하루가 매일 반복되는 일들을요.
그곳에서의 저는 매일 호수에 떠 있는데, 마음에 자꾸 파도가 밀려왔어요.
처음에는 철썩철썩 저항 없이 파도를 맞고 있었어요.
하지만 파도를 버틸수록 더 큰 파도가 계속 나를 기다렸어요.
이러다가는 파도가 호수든 나든 전부 삼켜 버릴 거 같아서..
허겁지겁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고요.”
불편한 이야기를 물었을까 염려가 되기 시작했다.
나의 호기심이 그녀 안에 있는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게 한 걸까.
아이들에게 젤리를 건네주며 시를 나누었을 결심과 그 시간이 관련이 있을까.
이런 나의 염려와 반대로 궁금한 입이 해맑게 다시 물었다.
“그럼.. 바다에 도착했나요?”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고개가 내 쪽으로 천천히 돌려지고 그녀의 큰 눈이 내 눈을 바라본다.
“.. 와.. 하하. 젤리 주고 싶은데요. 하하핫.”
“네?.. 아니,. 전 그냥.. 해랑이보다 시는 더 모르는걸요. 하하..”
내 말에 또 그녀가 웃었다.
깊은 생각 없이 뱉어진 말마다 그녀의 웃음이 민들레 씨앗처럼 퍼져 나왔다.
내가 이렇게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나 괜히 가슴이 한껏 펴진다.
그게 아닌 나를 놀리는 거라면, 마구마구 더 엉뚱해지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나를 워워 잠재우듯 다시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는 도서관을 참 좋아했어요.
용돈을 모아서 서점에 가는 날은 꼭 생일 같았죠.
고속버스를 타고 대형 서점이 있는 광역시에도 가고 동네 골목 깊은 곳에 세월 묻은 책방들도 찾아다녔어요.
그러다 책을 먹고 또 먹다가 체한 날이면 동네 문구점에 갔어요.
책 다음으로 나를 덜어줄 곳은 그곳이었나 봐요.
색연필을 사거나 물감을 사서 머릿속에 날아다니는 사람들을 그려 옷을 입혀 주는 게 좋았어요.
스무 살이 넘어서도 그러고 있었으니 가까운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죠.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거라고.
나는 괜찮았는데 책 속에, 그림 속에 사람들이 그 말을 들을까 두근거렸어요.
그 뒤로는 그게 무엇이든 꺼내는 것보다 간직하는 일을 택한 것 같아요.”
말을 멈춘 그녀가 두 발을 쭉 뻗어 양쪽 엄지발가락을 서로 맞대고 떨어뜨리기를 몇 번 반복한다.
“제 안에 뭐가 많아요. 누가 많이 사는 거 같고 자꾸 새어 나와요.
아침이면 언제 들어왔는지 베개 밑에서 시가 잠을 자고 있어요.
제 곁의 시가 스카이다이빙도 하고, 오로라를 보러 아이슬란드에도 가고, 깊은 산속 나무에 매달리기도 해요.
그래서 그 시를 성실히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겨진 시가 누군가를 붙잡아 줄 수 있다면 더 기쁠 것 같고요.”
그 긴 고백에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살면서 이런 독백은 처음이었다.
신나는 곡을 들을 때 어깨가 들썩이는 일.
액션 영화를 볼 때 손에 땀이 나는 일.
아마 음악을, 영화를 제대로 느끼고 있다는 것일 테다.
그럼 이야기를 들었을 때 최고의 느낌은 내가 그 속에 들어가 있는 거 아닐까.
그녀의 이야기는 나를 그녀의 시간으로 이끌었다.
나는 도서관 서가 사이를 걸어 다니는 소녀를 만났다.
종이 위에서 붓에 안겨 춤을 추고, 오랜 시간 숨바꼭질을 하며 버티고, 오로라를 떠올리며 비행기를 탔고, 높고 큰 나무에도 매달렸다.
그녀가 여태 오래도록 안고 있던 건 시만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는 아쉬운 소중한 무엇들이 그녀 안에 더 있었다.
그 고백을 듣는 동시에 내 안에 어떤 버튼이 눌렸을까.
그녀가 열망하는 시를 따라 나의 지난 열망의 불씨가 지펴지는 기분.
지키려는 지금의 나와 구하려는 과거의 나 사이의 기억.
그녀의 고백은 지난 그녀를 그려냄과 동시에 나의 기억까지 스케치할 종이를 내밀었다.
멍해진 내게 그녀는 봉지에서 꺼낸 맥주를 건네고 다른 맥주 하나를 따서 한 모금 마신다.
일단 마시라고.
고백에 고백으로 받을지 고민하지 말고 그냥 마시기만 해도 된다고.
움직이지 않는 그녀의 입에서 자꾸만 들려지는 말들을 어찌해야 할지.
귀가 기울어지는 만큼 오랜 시간 꼿꼿하던 나를 다 풀어내어 위로받고 싶어지는 마음 또한 어찌해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