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1. 그저 위로하려고

by 이유하

나는 되도록 나를 내어주는 쪽이었다.

내가 단단한 나무가 되어

땅속 깊은 뿌리가 되어

언젠가 무성해질 풀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의자를 놓고

튼튼한 가지로 그네를 매달아 놓고 싶었다.

언제든 앉았다 갈 수 있게

언제든 매달릴 수 있게

그러기만 하면 힘껏 밀어줄 작정이었다.

지난 회사 생활은 자꾸만 나를 잠식시켰다.

그곳은 날마다 일관된 틀을 만들어 사람 사이에 벽을 쳐 두었다.

낡은 규칙이 변화를 거치는 게 아니라 그 위에 또 다른 규칙을 쌓고 또 쌓았다.

그곳의 누구도 달라지는 계절의 표정을 느끼지 못한 채 모니터 앞에 자신들을 내버려 두었다.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이 귀중한 시간이 흘러갔다.

무기력이 계속되고 영혼 없이 손끝만 탁탁 소리를 내느라 하루가 다 갔다.

그러다 어느 날, 무거운 몸으로 늦은 출근길을 나서는데 아파트마다 쏟아져 나오는 등굣길 아이들을 만났다.

매일 보던 풍경이 그날은 새롭게 느껴졌다.

네모 상자 안에서 맑고 밝은 아이들이 줄지어 나왔고 신호등 불빛이 바뀌기만을 착실하게 기다리는 눈빛들을 보았다.

처음 마주친 내 눈길에 그 빛은 찡긋 눈웃음까지 쏘아댔다.

그때, 내 속에 무언가가 함께 찡긋하고 웃었다.


‘나만 보고 쓰던 마음속 글을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 꺼내야겠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글도 꺼낼 수 있다면 좋겠다.

이 찬란한 아이들부터 시작하자.

더 눈부신 자신을 놓치지 않도록 용기를 주자.

홀로 끄적이던 나의 세계에서 그들의 세계로 헤엄쳐 가보자.’


그렇게 그날의 결심이 추진력을 달아 바로 다음 해, 도서관을 오가는 아이들에게 뿌리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잘하고 있어!’

신나는 출근길, 아니 등굣길.

아이들로 꽉 채워진 하루, 책으로 둘러싸인 벽, 귀를 기울일 때마다 박히는 동시들.

거기까진 모든 게 괜찮았다.

내가 염원한 일과 공간이었으니까.

나는 나무요, 아이들은 잎새였으니까.

뿌리가 깊은 나무 밑에서 잎새들은 살랑이기만 하면 되니까.

도서관은 창문으로 허락된 바람만 머무는 곳이니까.


창문을 열어두고 어질러진 책들을 제자리에 꽂아 두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어젯밤 그림책에서 본 좋았던 문장 몇 가지를 포스트잇에 옮겨 적고 아이들의 눈에 잘 띄는 곳마다 붙여 두었다.

여기 있는 책을 다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는 읽은 책의 감상이나 질문들을 게시판에 적어 두기도 했다.

‘주인공은 양말을 왜 신지 않았을까?

나에게 양말이란?

왜 하필 양말일까?’ 등의 책을 읽으며 짚어내면 좋을 감상을 묻기도 하고, 내 생각을 짧게 적기도 한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각자의 그림을 다 그린 뒤에 내게 펼쳐주길 바랐다.

도화지 안에 그려진 세계를 보고 싶었다.

내가 그린 세계를 꺼내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거 하나 드세요~!”

반가운 목소리에 뒤돌아보니 책상 위에 올려진 바닐라 쿠키.

주인은 없고 실내화 가방만 덩그러니 바닥에 넘어져 있다.

“해랑아!!!!!!

가방 가져가야지!!!!!!!!”

복도를 질주하던 해랑이가 끼익 브레이크를 밟고 돌아본다.


해랑스러움.

이곳에 와서 내가 만들어낸 표현 중에 하나로 ‘순수하고 엉뚱하고 귀여운 거 모두 다 집합~!!’ 이런 느낌이랄까.

그리고 여기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넣어야 그 느낌이 완벽해지는데, 그건 바로 위하는 마음.

해랑이는 나의 첫 출근 날부터 빠짐없이 도서관을 찾아오는 아이였다.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책을 고르는 게 더 즐겁다고 했다.

아침 등굣길에 붉게 물든 아이의 입가를 볼 때면 놀란 마음에 손을 잡고 화장실로 데려가 조심스레 입을 씻어주곤 했다.

귀여운 미소에 매운맛을 폴폴 풍기며 나를 웃게 하는 아이.

씩 웃으며 달려와 내 손에서 실내화 가방을 받고 다시 복도 끝으로 달려간다.


해랑스러운 아침을 시작으로 또 누군가로 꽉 찰 오후를 마무리하는 나는,

기린 초등학교 소망 도서관을 가꾸는 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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