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이성적이고
엄마는 감정적이야
불평했었다.
90 년대 핫한 카페는 포켓볼대를 갖추었고, 한껏 꾸민 손님들이 커피뿐만 아니라 밀러, 버드와이저 같은 병맥주를 시키면 냅킨을 뚜껑에 예쁘게 말아 땅콩과 함께 내주었다. 카페에는 주방 아주머니도 있어서 김치볶음밥 같은 간단한 식사도 인기 메뉴였다.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이런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또래들과 함께 일 하는 모습도 재미있어 보였고 예쁜 사람들이 하는 아르바이트로 보였다.
부모님은 못 하게 하실 게 뻔해 엄두도 못 냈는데 한 번은 꼭 해봐야겠다 싶은 마음에 친구가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집에 일이 생겨 급하게 이틀정도 대신 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갔다.
그 후엔 친구가 사정상 그만두게 되어 사장님이 남은 방학 기간 동안만 내게 해달라고 부탁하신다고 하여 마지못해 허락하셨다.
당시 주급으로 용돈을 받았고 필요한 것은 따로 사주시던 때라 용돈이 부족하거나 큰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빵집이라고 한 거짓말은 곧 들통났다.
엄마는 예상보다 훨씬 화를 내셨고 처음엔 죄송하다고 빌던 나도 ”나보다 더 잘난 애들도 다 하는데 엄마는 왜 그렇게 못 하게 해? “ 하며 말이 안 통한다고 대들었다.
엄마는 더욱 화를 내시고는 안방으로 가셨고 나는 조금 울다가 방에 들어와 엄마는 꽉 막혔다고 곱씹었다.
그날밤 책상에 아빠가 편지봉투 하나를 올려두셨다,
겉면에 ‘ㅇㅇ이 아버지가’라고 내이름이 쓰여진 것을 보고 놀라며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는 두툼한 만 원짜리 뭉치와 이를 감싼 아빠의 손 편지가 들어있었다.
첫 줄에 내 이름을 부르는 아빠의 글씨를 보자 눈물이 쏟아졌다.
당시 죄송함 보다는 ‘역시 나를 사랑하셔’라는 안도의 눈물이었던 것 같다.
두 줄씩 흐르는 눈물 사이로 편지를 읽으며 내 손은 만원 짜리를 세고 있었다.
당시 주급으로 용돈을 7만 원 받았었는데 처음 만져본 두툼한 돈뭉치를 보니 ‘이게 대체 얼마야’싶어 울면서도 세었다. 뿌예진 시야 사이로 돈을 세던 모습이 얼마나 속물 같은지 지금 생각하니 ‘자식이란 참 저만 안다’ 싶다.
백만 원이었다. 놀랍고 기뻐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용돈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 생각하셨는지 ‘이 돈 받고 아르바이트는 그만두라’는 뜻이셨던 것 같다.
나는 돈은 돈대로 챙기고 ‘사람이 책임감 없게 당장 그만둘 수는 없다 사람 구해질 때까지는 가줘야 한다’고 고집하며 한 달을 채웠다.
집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 잠깐 냉랭한 엄마를 의식했지만 카페에서의 하루는 즐겁기만 했다.
철없는 자식
효도하는 자식
예전엔 결혼 안 한 자식은 부모 마음의 숙제로 남는 일이라 때 되면 결혼하는 게 효도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내 주위엔 결혼 안 한 친구들이 몇 있었다.
부모님은 생각날 때마다 내 친구들 결혼 걱정을 하시고 선도 주선하셨다.
“남의 집 딸들 결혼 걱정은 왜 그렇게 해요?”
“니 시집 안 가고 짜증 낼 때 하도 걱정해서 그 집 부모님들 맘 생각나가 그렇지”
그런데 세월이 한참 지나고 보니 결혼 안 한 딸이 한 명쯤 있는 노인분들이 안 외롭고 잘 사시는 것 같았다.
특히 한집에 사는 시집 안 간 딸은 노인분들에겐 같이 늙어가는 친구였다. 이야기 나누고 맛집 가고, 물론 시집간 딸들도 한다지만 따로 가정 있는 자식은 데리고 사는 미혼 자녀만큼 만만하진 않으실 것이다.
얼마 전 엄마가 고향으로 동창회 다녀오신다 해서 왕복 기차표 예매해 드렸는데 오후에 서울 오는 기차표는 취소해 달라고 친구 집에서 자고 내일 오신다고 전화를 하셨다.
나중에 들어보니 동창 중에 상부하고 혼자되신 분 집에서 자고 오셨다고 한다.
위로 아들 둘은 결혼을 했고 막내딸이 결혼 안 하고 고향에서 공무원인데 딸 본인 이름으로 40평 아파트 분양받아 예쁘게 꾸미고 살다가 엄마 혼자되시니 모시고 함께 산다고 하였다.
가는 길에 내려준다며 엄마를 동대구역까지 태워 주고 두 모녀는 또 어디로 가더라고 했다.
왠지 부러우신 것도 같고 괜히 미안하기도 해서
“시집 안 간 딸 있는 어머님들이 승자네” 했더니
“그런가?” 하시길래
“그럼 나도 보내지 말지 왜 그렇게 가라 가라 했어?”
“그래도 정여이 승여이 부라놨잖아 “
“부라놔 ? ㅋㅋㅋ“
“그래 니는 우리 갔뿌만 아무도 없이 혼자 아이가 니 혼자 두고 우리가 우예가노 그래도 가가 정여이 승여이 부라놨으이 안 외롭잖아 “
부라놨다는 표현이 재밌어 웃었지만
‘그랬구나 엄마 마음은‘
싶어 또 운다.
첫 아이가 많이 커서 제왕절개로 낳았을 때 부모님은 수술한 것에 걱정을 많이 하셨다.
첫째가 돌이 지나고 둘째 가질 생각을 하며 엄마도 당연히 바라실 것 같아 농담처럼 말했다.
“엄마는 내가 정연이 동생 낳았으면 좋겠어?”
“아이다”
“?? 정연이 그렇게 좋아하면서 그만 낳아?”
“내야 손자 많으만 좋지 근데 니 힘들까봐. 니 힘들으가 일찍 죽으만 우야노”
…….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또 울음이 맺힌다.
“뭐야 왜 죽어! 하하하‘ 하며 꾹꾹 눌렀다.
늘 “니해라‘ 하시는 엄마
그러다 주는 거 못 하는
불효하는 딸이 될까 봐
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