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얼굴에 사과하는 법
한 번씩 떠오르는 추운 얼굴이 있다.
추운 얼굴 1
90년대 초 새 차를 산 사촌언니가 차량용 전화기인 카폰을 설치하러 용산 전자상가에 함께 가자고 했다.
바람이 많이 부는 12월의 초저녁이었는데 재밌는 구경이 될 것 같아 흔쾌히 따라나섰다.
친절한 사장님과 사장님보다 나이가 더 많은 한쪽 다리가 불편한 직원 한 명이 있는 매장이었다.
조수석 글로브박스 쪽으로 구멍을 뚫고 선을 통과시키는 작업 후 가정용 전화기처럼 커다란 수화기를 들고 통화할 수 있는 카폰이 설치되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통화가 가능한 것이 신기하던 시절이라 나는 차 안 뒷좌석에 같이 타고 카폰 통화 연결을 보려 기다리고 있었다.
사촌 언니는 조수석에 있었고 사용 설명을 하느라 운전석엔 가게 사장님이 타고 있었다. 나이 많은 직원만 차량 밖에 서서 선팅이 된 닫힌 창문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설명을 마친 사장님은
“이제 잘 되나 전화 한번 해볼게요 “
하고는 창문을 내리고 밖의 직원에게
“가게로 걸어볼게 전화되나 가서 받아봐요”
하셨고 그 직원은 가게 쪽으로 빠르게 몸을 돌렸다. 호출음을 최대한 적게 울리고 받으려는 듯 짧은 거리지만 서둘러 들어갔다.
그때 사촌언니가 한 가지 더 질문을 했고 사장님은 그에 설명을 하느라 한참 전화를 걸지 않았다.
이를 모르는 직원은 안에서 기다려도 벨이 울리지 않자 안된다는 보고를 하려고 빠른 몸짓으로 차를 향해 다가왔다. 차창 가까이 얼굴을 대고 말하려는 순간 이를 보지 못한 사장님은 수화기를 들어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창문에서 안을 들여다보다 그것을 본 직원은 급하게 다시 몸을 돌려 가게 안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뒷좌석에 있던 나만 그를 보았다.
바람이 많이 불던 초겨울 저녁 불편한 다리의 직원은 뛰느라 빠르게 뒤뚱거렸는데 그 모습이 추운 계절과 함께 남았다.
추운 얼굴 2
아들이 쑥쑥 크던 초등학생 시절 겨울 패딩은 중저가로 사 입혔다. 어느 날 친구가 본인 아이도 쑥 커서 몇 번 못 입히고 묵혀둔 옷이라며 비싼 겨울 패딩을 주었다. 아이용이지만 당시 가격으로 60만 원쯤 하던 비싼 패딩이라 고맙게 받았다.
겨울 여행을 가던 날 처음으로 그 옷을 입혀 출발했다.
중간에 쉴 겸 들른 카페 야외 공간에 난로가 있었는데 아이가 주변에서 불을 쪼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불꽃이 튀었는지 어떤 열기에 닿은 건지 패딩 앞 면에 손톱만 한 구멍이 생겼다. 위치도 로고 밑 애매한 위치라 와펜으로 가릴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지금생각하면 이해가 안 될 정도로 화가 났다.
아이에게 “ 위험하잖아. 화상 입을 뻔했잖아 가까이 가자 말라고 했잖아”
말을 하면서 점점 화가 나는 나를 보았다.
60만 원 패딩을 입자마자 구멍 낸 사실에 진정이 안 되는 거라는 것이 느껴졌고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끝까지 화를 냈다.
그리고 점점 열을 내는 엄마 앞에서 변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미안하고 어쩔 줄 모르겠다는 하얗고 추운 얼굴이었다.
그 뒤로 계속 그 표정이 가슴에 남아 한 번씩 떠올랐고 그럴 때마다 미안했다.
어느 책에서 아이에게 미안한 일은 시간이 지났어도 사과하라는 글을 보았다. 부모가 혼을 낼 때 감정적으로 화내는 것인지 아이들은 다 안다고 꼭 사과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래 아이에게 사과하자.
고등학생이 된 아이에게 그 이야기를 주욱 들려주며 미안하다고 했다.
훈훈한 반응을 기대하며 아이를 보았더니
“기억이 전혀 안 나는데요? “
“! “
괜히 얘기했다.
추운 얼굴 3
내가 결혼하고 나자 아빠는 내게 잔소리를 안 하셨다. 여전히 철없고 서툰 나를 보며 불쑥 운을 떼시다가도 멈추고 싱긋 멋쩍게 웃는 게 다였다.
‘이젠 품 안의 자식이 아니지 ‘ 라며 굳이 당신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것 같았다.
아빠의 씩 웃는 얼굴이 어렸을 땐 탤런트 안성기 씨 미소 같아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볼 때마다 춥고
떠올릴 때마다 미안하다.
멋있던 그 얼굴이 추워 보여 맘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