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 14화: 다보스, 그리고 도광양회

진정한 혁신은 경쟁이 아닌 협력에서

by 크리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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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에서 손을 맞잡은 지 1년, 한국과 중국의 AI 반도체 협력은 숨 가쁘게 속도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미국은 첨단 장비 수출 금지, 투자 차단, 동맹국 압박 등 강력한 제재를 가했다.

하지만 워싱턴도 한국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한국의 초정밀 반도체는 미국 자국 공급망에도 필수였고, 동시에 중국의 기술과 움직임을 관찰하고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강경 제재, 속으로는 제한적 협력. 미국의 계산 속에서 한국은 브리지 역할을 맡아야 했고, 데이비드와 샤오메이는 그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길을 찾아야 했다.

그 사이 한국은 1nm 시대를 열며 세계 반도체 지도를 바꾸었고, 두 사람의 이름은 이미 새로운 질서를 상징하는 존재로 떠올랐다.



2027년 1월 20일, 스위스 다보스 포럼


알프스 설원 위에 세워진 작은 도시가, 다시 한번 인류의 운명을 논하는 무대가 되었다.

올해의 주제는 “기술로 하나 되는 세계”.

회의장 복도에는 여전히 계산과 불신, 경쟁과 연합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벽면의 유리창 밖으로는 눈보라가 알프스 산맥을 덮고 있었고, 그 차가운 바람이 회의장 안 긴장감을 더욱 선명하게 했다.

데이비드는 ‘글로벌 반도체 협력’ 패널의 좌장으로 섰다. 한국이 1nm 기술로 세계를 선도하면서, 이제 그는 국제무대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각국 정상들과 인사를 나누던 순간—

그의 시선이 얼어붙었다.

중국 대표단과 함께 입장하는 한 여인.

린샤오메이.

이제 그녀는 ‘중국 AI 기술협력단 단장’이라는 명함을 내밀 만큼,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단호함과 신뢰가 공존했다.

잠시, 회의장과 세계의 소음이 멎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만난 운명처럼 맞닿았다.

그리고 데이비드의 심장은, 긴장과 기대가 섞인 묘한 리듬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다보스 카페


창밖으로 눈 덮인 알프스가 고요하게 펼쳐져 있었다. 바람이 산봉우리 사이로 스치며, 커다란 유리창을 흔들었다. 카페 안은 따뜻했고, 갓 내린 커피 향이 나무 테이블과 어우러져 포근한 공기를 만들었다. 잔잔한 재즈가 흐르는 가운데,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대화가 배경음처럼 깔렸다.

데이비드와 샤오메이는 조용히 마주 앉았다. 서로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스치며, 가벼운 전율이 전해졌다.

"다보스에서 다시 만나니… 좋은데."

샤오메이의 미소 속에는 설렘과 긴장이 동시에 묻어났다.

"정말 그래. 그런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우리 상황이 어떻게 된 거지?"

"무슨 뜻이야?"

데이비드의 시선이 그녀의 눈빛에 꽂혔다.

"나는 중국 정부 대표고, 너는 한국 기업 임원이고… 공식적으로는 경쟁 관계잖아."

데이비드가 천천히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하지만 이게 우리잖아. 처음 MIT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어. 교실에서는 경쟁자였지만..."

"도서관에서는 함께 과제를 풀었지." 샤오메이가 그의 말을 이어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 데이비드가 물었다.

샤오메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과학자에게는 국적보다 호기심이 더 중요해.' 그렇게 말했잖아."

샤오메이의 눈이 커졌다. "정말 그랬나?"

"응. 그때 나도 깨달았어. 우리는..." 데이비드가 잠시 말을 멈췄다. "우리는 애초에 그런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아."

"경계선?"

"정부의 사람도, 기업의 사람도 아닌. 그냥... 뭔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

샤오메이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시선이 창밖 설원 위에 머물렀다. "때로는 그게 외로워."

"외로워?"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기분이랄까."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중국에서는 내가 너무 서구적이라고 하고, 서구에서는 내가 중국 사람이라는 게 먼저 보이고."

데이비드가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았다. "나도 그래. 미국에서 자랐지만 한국 사람이고, 한국에서는 또 미국 물을 너무 많이 먹었다고 하고."

두 사람이 잠시 웃었다.

"그럼 우리가 함께 있으면?" 샤오메이가 물었다.

"그럼 그냥... 우리야. 데이비드와 샤오메이." 그가 답했다.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는."

창밖 알프스 설원 위로 구름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바람이 카페 유리창을 스치며 지나갔지만,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은 따뜻했다.

데이비드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천천히 샤오메이의 손을 잡았다.

"샤오메이, 우리한테는 국경이 없어. 우리는 과학자야."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전 세계를 연결할 다리라는 의미가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현실을 바꾸면 돼. 우리가 그 물결이 되는 거야."

데이비드의 목소리에 확신이 담겼다.

샤오메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가슴속 깊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울림이 전해졌다.

창밖 알프스 설원 위,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날카로운 현실로 가득했지만, 그 중심에서 두 사람은 새로운 미래의 길을 열고 있었다.



회상 - MIT 시절 마지막 약속


MIT 졸업식 다음 날.

찰스강 위를 걸었다. 강물은 졸업식의 축하 풍선처럼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샤오메이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데이비드를 바라보았다.

"데이비드, 우리 약속하자."

그 말에는 웃음도, 긴장도 섞여 있었다.

"무슨 약속?"

"우리가 가는 길이 달라도… 같은 별빛 아래 서 있음을 잊지 말자."

데이비드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럼 우리는… 동반자인 거네?"

"응.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동반자."

두 사람은 동시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진짜로 함께 일할 날이 올 거야. 국경 따윈 상관없어."

데이비드가 놀란 듯 물었다.

"정말 가능할까?"

샤오메이가 미소 지었다.

"가능하지. 기술은 벽을 뚫고, 마음은 벽을 뛰어넘으니까."

바람이 찰스강 위를 스치며, 그들의 약속을 은은히 흔들었다.

그 순간, 미래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이미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길이 그려지고 있었다.



현재, 다보스 카페


"그때 찰스강에서의 약속 기억해?" 데이비드가 물었다.

"물론이지. 동반자가 되자던…"

"이제 그 약속을 현실로 만들 때가 왔어."

데이비드는 조심스레 제안서를 꺼냈다.

"Korea-China Technology Bridge Project."

샤오메이의 눈이 커졌다.

"이게 뭐야?"

"한-중 기술 협력의 새로운 모델이야. 네가 중국 총괄을, 내가 한국 총괄을 맡는 거지."

그 말에 샤오메이의 손이 잠시 떨렸다.

"정말? 가능해?"

데이비드는 창밖 설원을 바라보다,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양국 정부가 이미 승인했어. 우리가 1년 전 조심스럽게 시작한 비공식 협력을, 이제 공식 프로젝트로 확장하는 거야. 세계가 우리를 주목할 거야."

샤오메이는 잠시 숨을 고르고, 떨리는 손으로 제안서를 만졌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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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철학, 법학을 전공| 화가 | 작가 | AI·반도체·기업분석, 사유의 결로 꿰어진 이야기들, 다양한 분야의 통찰을 삶의 층위를 담아 저만의 방식으로 풀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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