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음이 내 삶을 바꾼 순간
지영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수박 두 덩이를 든 팔이 무거워서가 아니었다.
그 떨림은, 세속과 단절된 수도승의 공간처럼
고요하고 깊은 출판사 창고를 떠올리며 찾아온 묘한 설렘과 긴장 때문이었다.
3년 만에 다시 찾은 이곳,
그라비아 출판사의 500평 재고 창고 안쪽에서
범상치 않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횡격막을 두드리듯 장중하게, 그러나 어딘가 다정하게.
그 선율이 그녀의 심장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그곳엔 조르바 아저씨가 있다.
출판사 사장의 형이자, 거대한 재고 창고 한편에서
홀로 책을 다듬고 포장하며 살아가는 사람. 사람들은 그를 ‘조르바 아저씨’라 불렀다. 삶을 향한 열정은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의 침묵은 오히려 조르바보다 깊고 무거웠다.
자유로운 영혼이라 하기엔 그보다 더 독특하고, 신비롭고,
때로는 시대의 뒷면을 응시하는 현자 같기도 했다.
젊은 시절엔 사회운동가로 이름을 날렸고,
대학 시절엔 늘 두터운 철학서나 사상서를 품에 안고 다녔다.
모임에서는 조용했지만, 마지막에 그가 꺼낸 한두 마디는
마치 길잡이별처럼 모두의 방향을 정해주곤 했다.
말보다 침묵이 더 깊었고,
그 침묵이 끝날 즈음의 말은 곧 진리였다.
무겁고 깊은 화음이 폐부를 파고들 듯 울려 퍼질 때마다,
지영은 문득 런던에서의 밤을 떠올랐다.
차가운 벽돌 건물의 틈새로 스며들던 안개,
끝내 꺼지지 않던 조명 아래,
잉크 냄새와 오래된 커피 향이 뒤섞인 밤공기.
그곳에서 그녀는 혼자였고, 홀로 버텼으며,
무언가를 끝내고 떠나야만 했다.
그날도 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송곡처럼 무거웠지만, 그 속엔 단단한 인간 존엄의 숨결이 있었다.
지금, 이 창고 깊숙한 곳에서 다시 들리는 선율이
과거의 한밤을 소환하는 주문처럼
지영의 폐부를 눌렀다.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수박의 둔탁한 무게가 팔을 타고 내려왔지만,
그보다 더 무거운 것은
가슴속 어딘가에서 다시 울리는 런던에서의 어떤 밤의 진동이었다.
“넌 참 특이해. 다른 애들은 다 펍에서 놀고 있는데.”
런던 유학 시절, 친구들이 웃으며 건넨 그 말이
여전히 귓가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처음엔 몇 번쯤 따라갔던 펍.
안개빛 흐릿한 조명 아래 웃고 떠들던 그 시간들 속에서
지영은 이상하게 지루함을 느꼈다.
술잔을 부딪히는 소리보다,
비 내린 템즈 강 너머로 흐르던 비올라 선율이
훨씬 또렷하게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밤이면 로열 페스티벌 홀로 발길을 돌렸다.
학생 할인표를 끊고, 무대 뒤 합창석에 조용히 앉았다.
그 자리에서 지휘자의 손끝을 바라보며 듣던 음악은
그 어떤 말보다 깊었고,
그 어떤 위로보다 정직했다.
악장의 흐름에 따라 몰려오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지영은 오히려 자기를 더 또렷이 느꼈다.
그 밤들—어쩌면 혼자였기에 더 벅찼던—
그 시간들이,
그녀의 대학 시절을 가장 단단하게 빛내주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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