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 침묵의 파도
묵호로 훌쩍 떠나 오랜만에 바닷바람을 쐬고 있다.
강릉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한 시간 더 달리니 묵호항이 나타났다.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왔던 그 작은 어항. 시간이 멈춘 듯한 이곳에서 나는 마침내 숨을 쉴 수 있었다.
파도 소리가 내 머릿속 잡음들을 하나씩 지워간다.
회사 복도의 딱딱한 발걸음 소리, 프린터가 쉴 새 없이 뱉어내는 투자보고서들, 늘 똑같은 멘트로 시작되는 아침 회의, '지영 씨 수고하셨어요'라는 기계적인 인사들... 모든 것이 바닷바람에 날려가고 있다.
휴대폰을 껐다.
아니, 정확히는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겨우 참고 무음 모드로만 해두었다. 아직은 완전히 끊어낼 용기가 없었다.
방파제 끝에 앉아 다리를 툭툭 흔들며 수평선을 바라본다. 저 멀리 화물선 하나가 점처럼 보인다.
3년 전의 나라면 저 배를 보고도 '해운업 펀드 수익률이 어떨까?' 같은 생각을 먼저 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투자 수익률로 환산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냥 아름답다.
배가, 바다가, 하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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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지영아, 네가 왜 갑자기?"
어제 사표를 낸 후 엄마에게 전화했을 때 엄마가 한 말이다.
"투자회사가 얼마나 남들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인데... 연봉 많고."
엄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월급에 보너스까지 합치면 꽤 괜찮은 수입이었고, 강남 한복판 사무실, 명함에 적힌 '애널리스트'라는 타이틀. 엄마 세대에게는 성공의 상징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성공이 내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 날, 팀장이 말했다.
"지영 씨, 정말 아깝네요. 곧 과장 승진도 얘기 나올 텐데..."
과장.
신입사원 때는 그 직급이 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두 글자가 족쇄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성공한 것 같은데 공허하다고, 돈은 제법 벌지만 영혼이 메말라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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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임의 실체]
바닷가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지난 3년을 돌이켜본다.
처음 투자회사에 입사했을 때는 느낌 괜찮았다.
24층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는 강남 풍경, 로비의 반짝이는 대리석, 복도 벽에 걸린 현대미술 작품들,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 모든 것이 드라마 속 세상 같았다.
"지영 씨, 여기서는 하루에 수 억 원짜리 투자 결정을 해요. 긴장하지 말고 열심히 하세요."
첫날 선배가 해준 말이다. 수 억 원. 그 숫자가 주는 무게감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반짝임이 겉만 번지르르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는 스프레드시트와 숫자들의 무한 반복이었다. 기업 가치를 평가하고, 리스크를 계산하고, 수익률을 예측하는 일. 사람은 숫자가 되고, 감정은 수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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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선배의 경고]
정민 선배가 생각난다.
나보다 2년 먼저 입사한 그는 완벽한 금융맨이었다. 새벽 6시 출근, 밤 11시 퇴근이 일상이었다. 주말도 당연히 출근했다.
"지영아,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해."
정민 선배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항상 레드불과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었다. 점심도 거의 건너뛰었다. "시간 아깝다"면서.
어느 날 그가 화장실에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갔다. 과로로 인한 탈수였다.
병원 침대에서 그가 한 말이 지금도 귀에 맴돈다.
"지영아, 나 이상해졌나 봐. 돈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 사람보다, 건강보다, 심지어 가족보다도."
그 후 정민 선배는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 충주로 내려갔다. 지금은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한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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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프로젝트]
청록빛 바다색과 대비되는 하얀 거품이 끝없이 밀고 오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담당했던 프로젝트가 떠오른다. 경기도의 한 중소 제조업체 투자 건이었다. 3대째 이어온 가족기업이었는데, 성장 자금이 필요해서 투자를 받기로 한 거였다.
대표는 60대 초반의 온화한 분이었다. 계약서를 검토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 직원들 일자리는 괜찮을까요? 아버지 때부터 30년 넘게 다닌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때 나는 뭐라고 했었지?
"걱정 마세요. 저희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해 드릴 테니까요."
효율적으로.
그 단어가 지금은 너무 차갑게 느껴진다. 30년 넘게 한 곳에서 성실히 일한 사람들을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재단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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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해가 지기 시작한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하늘이 선명한 주황색으로, 그다음 그러데이션 빛의 분홍색으로, 마지막에는 흐린 보라색으로 변한다.
이런 풍경을 언제 마지막으로 봤었을까?
회사 다니면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항상 사무실 형광등 아래에만 있었으니까.
문득 런던의 대영박물관에서의 한 때가 그리워진다.
교수님과 함께 미술관을 다니며 스케치도 하고 작품을 감상하던 시간들. 화가들의 삶과 철학에 대해 토론하던 세미나 시간들.
그때는 돈보다 의미가 중요했다. 성공보다 진정성이 중요했다.
살다 보면 예측하기 어려운 뜻밖의 순간들도 있고 무심한 듯 버텨야 할 순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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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성찰]
어둠이 깔리는 순간, 나는 묵호항 근처 낡은 민박으로 돌아왔다.
잠깐 비스듬히 몸을 침구에 기댔다.
어느새, 나는 낯선 형체가 되어 있었다.
찬 창문 틈으로 스며든 바람이 차갑게 스쳐간다.
몸이 무겁고, 움직일 수 없다.
내 안 어디선가 낯선 존재가 꿈틀대는 기분.
분명 나는 나였으나, 동시에 내가 아니라는 기이한 감각.
이 반복되는 혼란 속에서, 나는 점점 희미해진다.
나라는 세계의 경계가 낮게 무너져 내리고,
소리 없이 스러져가는 나를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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