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엔비디아 편: AI 시대의 공간 설계자

게임에서 시작해 세상을 바꾼 한 남자의 이야기

by 크리슈나


프롤로그: 검은 가죽 재킷의 남자


2024년 3월, 미국 산호세 SAP 센터


1만 명이 넘는 개발자들이 숨을 죽이고 무대를 바라본다. 마치 록스타의 콘서트장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이곳은 콘서트홀이 아니라 기술 콘퍼런스장이다.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한 남자가 무대에 오른다. 61세, 대만계 미국인, 젠슨 황. 그의 손에는 작은 칩 하나가 들려 있다.


"이것이 새로운 산업혁명의 시작입니다."


그 순간,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마치 새로운 아이폰을 공개하는 스티브 잡스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남자가 들고 있는 건 스마트폰이 아니라 GPU다.


30년 전만 해도 '게임이나 하는 장난감'이라고 무시받던 그래픽카드가 이제 세상을 움직이는 심장이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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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꿈의 설계도


1장: 데니스 식당의 기적


1993년 4월, 캘리포니아 산호세의 한 데니스 식당


세 명의 젊은 엔지니어가 플라스틱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다. 커피는 식었고, 냅킨에는 온갖 도표와 숫자들이 끄적여져 있다.


젠슨 황, 30세. LSI Logic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 설계를 하던 엔지니어다.

크리스 말라코프스키, 그의 동료.

커트 프림, 또 다른 천재 엔지니어.


"우리가 뭘 만들어야 할까?" 황이 물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 그래픽스는 변방의 기술이었다. 대부분의 PC는 텍스트만 표시했고, 그래픽이라고 해봐야 16색짜리 픽셀 덩어리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황은 다른 미래를 보고 있었다.


"언젠가는 모든 컴퓨터가 영화 같은 그래픽을 보여줄 거야. 3차원 세계가 화면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날이 올 거라고."


동료들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때만 해도 3D 그래픽은 수백만 달러짜리 워크스테이션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날이 정말 올까?"


황은 냅킨에 간단한 그림을 그렸다. CPU 하나가 모든 걸 처리하는 기존 방식 말고, 수백 개의 작은 프로세서가 동시에 일하는 새로운 구조.


"이렇게 하면 될 거야."


그날 밤, 엔비디아가 탄생했다.


회사 이름은 라틴어 'invidia(시기, 질투)'에서 따온 것이었다. 경쟁자들이 질투할 만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몰랐다. 30년 후 이 회사가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치고 세계 최고 가치 기업이 될 줄은.


2장: 첫 번째 실패의 교훈


1995년, 엔비디아 첫 번째 제품 NV1 출시


스타트업의 현실은 냉혹했다.


2년 동안 밤낮없이 개발한 첫 번째 제품 NV1이 완전한 참패를 맞았다. 문제는 황이 너무 앞서간 것이었다.


NV1은 곡선 기반의 렌더링 방식을 사용했다. 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그래픽을 만들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하지만 시장은 준비되지 않았다. 게임 개발자들은 모두 삼각형 기반의 폴리곤 방식에 익숙했다. 아무도 NV1의 방식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았다.


회사는 파산 직전까지 갔다. 직원들은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황은 텅 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는 실리콘밸리의 네온사인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틀렸나?"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시장이 원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그 순간부터 엔비디아의 철학이 바뀌었다. 기술 우선이 아니라 시장 우선. 개발자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3장: RIVA 128의 역전


1997년, 두 번째 도전


황은 완전히 다른 접근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시장의 소리를 들었다. 게임 개발자들을 만나고, 경쟁사 제품을 분석하고, 사용자들의 불만을 수집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RIVA 128이었다.


혁신적인 기술을 포기하고 대신 '실용성'에 집중했다. 게임 개발자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고, 일반 소비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의 제품.


출시와 동시에 대박이 터졌다.


퀘이크, 톰 레이더 같은 인기 게임들이 RIVA 128에서 부드럽게 돌아갔다. 갑자기 PC 게이밍이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했다.


황은 깨달았다.


기술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진짜 목적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진짜 혁신은 아직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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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패러다임의 전환


4장: GPU의 탄생


1999년, GeForce 256 발표


"세계 최초의 GPU"


황이 무대에서 이 문구를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GPU? 그게 뭔가?


지금까지는 '그래픽 가속기' 또는 '비디오 카드'라고 불렀다. 하지만 황은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냈다.


Graphics Processing Unit. GPU.


단순히 이름만 바뀐 게 아니었다. 철학이 바뀐 것이었다.


기존의 그래픽 카드는 CPU의 보조 역할이었다. CPU가 계산한 결과를 화면에 뿌려주는 '출력 장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GeForce 256은 달랐다. 자체적으로 복잡한 3D 계산을 처리할 수 있었다. T&L(Transform & Lighting) 엔진을 내장해 CPU의 부담을 크게 줄였다.


이건 컴퓨터 구조의 혁명이었다.


하나의 CPU가 모든 걸 처리하는 시대가 끝나고, 전문화된 프로세서들이 협력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게임이 좀 더 예뻐지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황만이 알고 있었다. 이것이 단순한 게임용 칩이 아니라는 것을.


5장: 프로그래머블의 혁신


2001년, GeForce 3의 등장


"이제 여러분이 직접 GPU를 프로그래밍할 수 있습니다."


이 발표는 업계에 충격을 줬다.


지금까지 GPU는 '고정된 파이프라인'으로 작동했다. 미리 정해진 방식대로만 그래픽을 처리할 수 있었다.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같았다.


하지만 GeForce 3는 달랐다. 프로그래머블 셰이더를 지원했다. 개발자들이 직접 코드를 짜서 GPU에게 "이렇게 계산해라"라고 명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건 혁명이었다.


갑자기 GPU는 단순한 그래픽 장치가 아니라 '범용 컴퓨팅 머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래픽이 아닌 다른 계산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랐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인지.


스탠퍼드 대학의 한 연구실에서는 몇몇 대학원생들이 이상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GPU로 일반적인 수학 계산을 시켜보는 것이었다.


"어? 이거 CPU보다 훨씬 빠른데?"


그때만 해도 아무도 GPGPU(General Purpose GPU)라는 단어를 몰랐다.


하지만 씨앗은 뿌려졌다.


6장: CUDA의 탄생


2006년, 황 CEO의 큰 결단


"우리는 GPU 회사가 아닙니다. 컴퓨팅 회사입니다."


황이 이 말을 했을 때, 이사회는 경악했다.


엔비디아는 그래픽카드로 성공한 회사였다. 게이밍 시장에서 ATI(현재의 AMD)와 치열하게 경쟁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컴퓨팅 회사'라니?


황은 5억 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CUDA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CUDA(Compute Unified Device Architecture). GPU를 범용 컴퓨터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플랫폼이었다.


"미쳤다." 업계의 반응이었다.


GPU는 게임용이다. 과학 계산? 그건 CPU나 전용 서버가 하는 일이다. 누가 그래픽카드로 복잡한 연산을 하겠나?


하지만 황은 다른 미래를 보고 있었다.


병렬 컴퓨팅의 시대가 온다.


인텔의 CPU는 아무리 빨라도 한 번에 하나씩만 처리한다. 하지만 GPU는 수백 개의 코어가 동시에 일한다. 적합한 문제만 주어진다면 CPU보다 수십 배 빠를 수 있다.


문제는 '적합한 문제'를 찾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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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철학, 법학을 전공| 화가 | 작가 | AI·반도체·기업분석, 사유의 결로 꿰어진 이야기들, 다양한 분야의 통찰을 삶의 층위를 담아 저만의 방식으로 풀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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