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이 반복되는 이유

청춘 15

by 박범진 작가

회사에 다니면서 세 번의 구조조정을 겪었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구조조정의 불안감은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같은 자리에서 항상 나와 같은 모습으로 인생을 달릴 것 같던 동료들은 점점 사라졌다. 다른 길에 들어선 그들의 용기가 한편으로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 걱정되었다. 그들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그들만의 길을 선택했다. 나는 회사에 남아 승진 누락의 패배감을 느끼며 경쟁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체감하였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그러나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 지나간 것을 어설프게 건드려 젊은 기억의 그리움을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다. 이제 지난날을 되새김하는 것보다 그리움으로 남겨두는 것이 더 좋은 나이가 되었다. 뒤돌아 가기에 너무 멀리 왔다면 차라리 앞만 보며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기쁨도 슬픔도 어차피 시간 속에 묻혀 사라질 테고 나를 위로하는 것은 아직도 무언가로 채울 시간이 남아 있다는 안도뿐이다.


그러나 다시 설명하지 못할 불안감이 샘솟는다. 그때의 힘겨움도 세월이 지나면 잊힐 줄 알았는데 맞닥뜨린 현실 앞에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과거의 기억을 뒤적거리고 있다. 그리고 한 번이면 족할 줄 알았던 상황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십 년 전의 고민을 돌아본다.


2002년 3월 22일 금요일 이십 년 만의 강한 황사가 서울을 노랗게 뒤덮었다. 황사는 내가 가본 적 없는 낯선 땅에서 서울 하늘까지 날아왔다. 아무도 흐르는 시간을 막아 세울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무엇으로 시간을 채울지 고민하는 것뿐이다. 목표에 대한 발걸음은 더디기만 한데 젊음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황사에 뒤덮여 밝지도 흐리지도 않은 하늘처럼 앞날이 답답하다.

2002년 4월 13일 토요일 대학 친구 M을 만났다. 회계사 시험에 합격하여 지금은 여의도의 한 회계 법인에서 근무하고 있다. 친한 친구였기에 그가 회계사가 된 것이 무척 기뻤다. 그는 더 이상 허름한 옷차림으로 도서관 구석에 처박혀 있던 초라한 고시생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만 맴도는 것 같아 당황스럽다. 내가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2002년 6월 27일 목요일 침통한 나날들이다. 같은 부서에는 나보다 일찍 입사했지만 나보다 어린 동료가 있다. 내가 먼저 이 부서에서 근무했기에 먼저 승진할 줄 알았다. 나는 나이 어린 대리를 모시는 나이 든 사원이 되었다. 그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씨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대리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호칭이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친한 사이라서 그냥 ○○대리라고 부르면 된다. 그러나 내가 승진에서 ○○대리에게 밀렸다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다. 세상은 언제나 승자 편이다. 사회의 냉정함에 좌절하여 회사를 그만둘까도 생각해 봤다. 비상구 계단에서 창밖을 보는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지 눈가에 눈물이 흐른다. 괜히 나를 눈치 보는 주변 동료들이 나를 더 힘들게 한다. 나에게 서서히 닥쳐올 월급쟁이의 비애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작은 시련에도 이렇게 크게 흔들릴 줄 몰랐다. 세상은 여기서 주저앉을 것인지 여기를 뛰어넘을 것인지 나에게 묻는다.


2002년 7월 22일 월요일 회사 동기가 승진 누락으로 우울한 나에게 태국 여행을 같이 가자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 대학교를 나와 월가(Wall Street)에서 일했었다. 나이는 같지만 나보다 세상을 더 일찍 깨우친 형 같은 놈이다.

2002년 7월 23일 화요일 태국 사람들에게서 미래의 걱정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태국은 불교의 나라라 사람들은 윤회설(輪回說)을 믿는다. 이승에서 착하게 살면 저승에 가서 좋은 심판을 받아 부자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욕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나는 욕심의 다른 이름인 돈을 만지는 회사에 다닌다. 욕심이 없다면 걱정도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게을러 보이는 태국 사람들을 존경스럽게 만든다.


2002년 7월 24일 수요일 태국의 전통 안마를 받으러 갔다. 안마사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앳된 여자아이였다. 여자아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옆에 여자아이와 웃고 떠들며 즐거워한다. 내 눈에만 안타까울 뿐 그들은 행복하다. 행복은 설명하기 힘든 묘한 감정이다.

2002년 7월 25일 목요일 비행기에 올랐다. 창 너머 어두워진 시내를 보면서 또 언제 이곳을 올 수 있을지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곳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며 안도한다.


태국 여행을 같이 갔던 친구는 얼마 후 다른 회사로 이직하면서 연락이 끊겼다. 나보다 먼저 승진했던 같은 부서의 대리도 한동안 연락이 되었다가 이제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벌써 이십 년이 훌쩍 흘러갔다. 그렇게 내 가슴을 헤집던 아픈 기억이 이제는 아무 감정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과거로 남아 있다.

세월이 지나면 폭풍 같던 세상도 잠잠해지고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살아갈 날이 남아 있기에 고민이 많다. 그 고민은 이십 년 전의 고민과 닮았다.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는데 나만 제자리에 있는 것 같고 욕심은 사그라지지 않고 행복은 멀게만 느껴진다.


세월이 지나도 세상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같은 고민을 반복하게 만든다. 고민이 반복되는 이유는 반복되는 고민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결할 수 있는 고민은 절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은 인생의 고민이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다시 그 고민을 반복하는 것이다. 반복되는 고민은 해결할 수 없다고 받아들일 때 인생의 불안은 줄어들고 행복은 다가올 것이다.

keyword
이전 15화서른이 아직은 젊은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