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만 원이 고마운 이유

청춘 16

by 박범진 작가

훈련소 마지막 주에 군장을 메고 산으로 행군하였다. 온통 잿빛인 훈련소를 벗어나니 세상은 일곱 색깔 무지갯빛이었다. 등에는 30kg이 넘는 군장을 메었지만, 무지개 세상에서 날아갈 것 같았다. 4월의 햇살은 생각보다 뜨거웠고 등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우리가 갔던 산은 시민들이 자주 찾는 산이었다. 그날 초등학교 학생들이 소풍을 왔다. 한 초등학생이 들고 있던 그 사이다가 지금도 너무 마시고 싶다. 지난 세월만큼이나 사이다를 마셨지만, 아직도 그때 그 초등학생이 들고 있던 사이다의 맛이 궁금하다.

훈련소에서 퇴소하는 날 초코파이를 든 가족들이 단상 뒤에서 퇴소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우리 가족도 와 있을까? 퇴소식이 끝나고 며칠간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동기들은 연병장에서 가족들과 얼싸안고 있었다. 나는 잠시 혼자였다. 그때 멀리 단상 뒤에서 어렴풋이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아버지였다. 항상 고향에서만 뵈었던 분을 JJ에서 뵈니 기분이 이상했다. 현실에만 충실했던 아버지와 살갑게 지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반가웠다. 점심을 먹고 아버지와 기차를 탔다. 아버지와 단둘이 기차를 탔던 일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다.


훈련병들은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자대로 배치받았다. 훈련소를 떠나는 전날 조교들은 훈련병들에게 집으로 전화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러나 내무반 옆 공중전화에는 훈련병들이 줄을 길게 늘어섰다. 훈련병이 JJ역에서 기차를 타서 자대 근처 기차역에 내리면 자대에서 훈련병을 데려갔다. 내릴 기차역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훈련병에게 배치 부대를 알려주지 않았다. 훈련병들이 집에 전화하면 부모님들은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아들이 편안하고 안전한 부대에 배치받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도 훈련병들의 배치 부대가 바뀔 수 있다.


나는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서지 않았다. 남들처럼 기댈 곳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JJ역에서 나를 태운 기차는 어느새 고향을 지나가고 있었다. 차창 너머에는 고향 집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부모님은 그때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끝없이 올라가던 기차는 나를 PT역에 토해냈다. 그렇게 해서 나는 OS부대에 배치받았다.

부대에 배치받은 첫날이었다. 총무 특기라서 전대 본부의 행정 일을 맡게 되었다. 한편 훈련소에서 말로만 듣던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훈련병들은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면서 부모님의 걱정만큼 용돈을 받아 왔다. 부모님은 힘들어할 아들에게 돈이라도 쥐여 주어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했다. 이런 부모의 마음을 이용하는 나쁜 놈이 있었다. 내무반에 더플백(Duffle Bag)을 놓고 본부에 인사하러 갔다. 저녁에 와보니 더플백에서 십만 원이 없어졌다.


다음날 헌병대에 도난 신고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늘 있던 일처럼 형식적인 조사만 하고 돌아갔다. 이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중에 선임병 하나가 나에게 돈의 행방을 얘기해 주었다. D 병장이 훔쳐 갔을 거라고 했다. D 병장은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아 내무반에서 뒹굴뒹굴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D 병장은 어리바리한 신병이 돈을 가진 것을 알고 훔친 것이다. 이런 일이 내가 처음은 아니라고 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내 돈을 훔친 D 병장은 부자가 되어 잘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D 병장의 낯짝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 부모님의 걱정을 훔쳐 간 D 병장 덕분에 걱정 없이 군대 생활을 잘 마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십만 원이 고마운 이유이다. 그러나 더 이상 그가 남의 돈을 빼앗지 않고 살았기를 바란다.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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