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18
얼마 전 일기를 뒤적이다 고향 친구가 생각나 전화를 했다. 그 친구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회사에서 일찍 퇴직하고 창업을 하였다. 그러나 사업이 신통치 않아 마음고생이 심하다. 그 친구는 내가 가장 외로울 때 함께 했던 친구라 마음이 안 좋다. 내가 그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 없으니 위로밖에 해 줄 것이 없었다. 똑같은 위로의 말이라도 누가 해 주느냐에 따라 가슴에 와닿는 무게는 다를 것이다. 나의 위로가 그의 가슴에 진심으로 닿아 잠시라도 그를 쉬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인생은 원래 외로운 길이지만 마음 터놓을 친구 하나 있으면 그렇게 외로운 길도 아니다. 한편 벌써 이십 년도 지난 일이지만 지금 친구에게 사과하고 싶다.
그날은 내가 대학원생이었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고향 친구 S는 여자친구 문제로 힘들어했었다. 여자친구는 두 남자를 양다리에 걸치고 저울질하였다. S의 무게가 다른 남자친구의 무게보다 가벼워 보였다. 좀처럼 힘든 내색을 안 하는 친구인데 그날따라 몹시 힘들어 보였다. S는 자취방에서 무기력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춘천에 가자고 권유했다. 우울하고 힘들 땐 노래처럼 훌쩍 춘천 가는 기차를 타고 떠나면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집에서 쉬고 싶다던 친구를 억지로 끌어내어 청량리역으로 갔다. 무작정 매표구 앞에 줄을 섰는데 다행히 입석이 있었다. 기차에 올라탄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었고, 우리는 그들 사이에서 우울함이 돋보였다. 낡은 가죽 잠바에 책가방을 둘러맨 나와 방금 자다가 일어난 부스스한 친구는 그들과 많이 달라 보였다. 기차를 따라 흐르는 강 위에는 봄 햇살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2시간 남짓 달려 아무도 반기는 이 없는 춘천에 도착했다. S를 위로할 방법은 그저 춘천 닭갈비에 동동주를 마시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연애조차 시도해 보지 못한 나는 그 친구가 부러웠다.
얼마 후 어느 일요일 아침이다. S에게 오늘 뭐 하냐고 전화했다. S는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다. 오늘 여자친구랑 강릉에 바람 쐬러 간다고 했다. 그리고 S는 미안한지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그때 나는 전화를 끊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 아름다운 일요일에 외로움과 싸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S와 S의 여자친구 그리고 나는 강릉에 가게 되었다. 서울에서 강릉까지는 자동차로 세 시간 거리였지만 마음의 거리는 예닐곱 시간은 더 되는 것 같았다. S와 S의 여자친구가 자동차 앞자리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뒷자리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침묵으로 일관했다. S의 여자친구가 싸 온 방울토마토가 S의 입으로 들어가는 동안 나는 창밖을 보며 애써 외면해야 했다. 그래도 방울토마토는 가끔 나에게도 왔다. S가 외로움에 몸부림칠 나를 구해줘서 감사했다. S는 내가 대학원생일 때 외로움을 달래준 유일한 친구였다. S의 자취방에는 언제나 내가 입을 잠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힘들 때마다 S의 집에 가서 삼겹살도 구워 먹고 잠도 자고 왔었다. 어느새 우리는 정동진을 거쳐, 망상해수욕장에 도착하였다.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푸른 바다가 넘실넘실 춤을 추고 있었다. S와 S의 여자친구가 바닷가에서 술래잡기하는 동안 나는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았다. S는 이제 아름다운 바다를 같이 볼 사람이 생겼다. 나는 그저 아름다운 바다를 혼자 쓸쓸히 찬양하였다. 그럴 줄 알면서도 친구의 여행에 부담을 주어 미안했었다.
“S야! 나 눈치 없는 놈 아닌 거 알지. 그러나 그날은 외로움과 싸울 자신이 없었어. 불편했을 텐데 데려가 줘서 고마워.”
S도 나도 가정을 꾸렸고 이제는 한 번쯤 노후를 생각할 나이가 되었다. 지나고 보니 인생은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에 S가 있어서 젊은 날이 외롭지 않았다. 내 인생에 그가 있어서 다행이고 그의 인생에 내가 있어서 다행이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먹고사는 데 바빠 서로 연락이 뜸했다. 이젠 세상 시름 내려놓고 편안하게 만났으면 좋겠다.
나이가 드니 내가 찾는 사람보다 나를 찾는 사람이 더 소중해진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좁아지지만, 마음은 더 충만해지는 것 같다. 문득 외롭다고 느낄 때 내 마음에 친구 하나가 찾아온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친구 하나면 인생은 충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