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18
사람은 돈에 죽고 돈에 산다. 돈이 없어서 맥없이 죽기도 하고 돈을 많이 벌려고 끈질기게 살기도 한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인생은 돈으로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돈은 말이 없지만, 사람들은 돈이 없는 인생을 불행하다고 생각하여 돈에 행복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이제는 물질문명이 심화하면서 돈에다 목숨이라는 이름도 붙여 놓았다. 인생은 목숨이 있을 때 존재한다. 그렇다면 인생은 돈이 있어야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인생은 죽음이 있을 때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돈이 없으면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인생에서 돈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돈 때문에 힘들었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게임에 참가한다. 그들은 빚진 돈을 갚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게임에서 져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 게임에서 살아남으면 456억이라는 상금을 얻게 된다. 참가자들은 한차례 돈과 목숨을 바꿔서는 안 된다고 깨닫고 게임을 포기한다. 그들은 세상 속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돈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은 인생에서 희망을 지운다. 죽음이라는 공포도 금세 잊고 그들은 다시 목숨을 건 게임에 참가한다. 그들은 돈이 없다면 인생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상금을 거머쥔 우승자가 나왔다. 그러나 우승자는 455명의 사라진 목숨에 죄책감을 느껴 돈을 마음대로 쓰지 못했다. 우승자는 돈으로 목숨을 사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깨달았다. 돈은 그렇게 참가자 모두를 속였다. 나중에 우승자는 게임의 주최자를 만나게 된다. 게임의 주최자는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없어 게임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는 세상에서 돈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이 더는 없다고 생각할 때 이 게임을 만든 것이다. 어느 정도의 돈이 있어야 세상에서 돈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이 더는 없다고 생각할지 궁금하다.
2020년은 코로나바이러스로 유례없이 힘든 한 해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경기회복을 위해 풀린 돈이 주식이나 비트코인 투자로 몰리면서 탐욕에 잠식된 한 해이기도 하다. 인간의 탐욕은 어디까지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사기꾼일 것이다.
몇 해 전 인간의 탐욕을 이용한 비트코인 사기가 유행했었다. 사기 범죄는 현대 문명에 익숙한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현대 문명에 적응하기 힘든 나이 든 세대에서도 발생하였다. 사기꾼은 현대 문명이 다소 빗겨나간 시골로 파고들었다. 그들은 동네 사랑방인 미용실에서 비트코인에 투자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떠들어 댔다.
처음에 믿지 않던 어르신들은 누군가가 투자했더니 은행보다 훨씬 높은 이자를 받았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어르신들은 하나둘 인생과 맞바꾼 몇천만 원을 신문지에 돌돌 말아 미용실로 가져온다. 사기꾼은 그렇게 동네 사람들의 돈을 거둬들인 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인생의 끝자락에서도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욕망을 모두 채울 수 있는 돈의 양은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르신들은 정신을 차려보니 잃어버린 돈보다 돈과 맞바꾼 지나간 인생에 더 허무해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인생을 돈과 맞바꿀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살다 보니 돈이 있으면 인생이 행복해질 것 같았고, 돈으로 목숨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낀 것이다. 돈은 죽음과도 함께 갈 수 있는 그 이상의 무엇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저승에 갈 때도 돈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죽어서도 노잣돈이 없으면 저승으로 못 가는 세상이다. 돈은 그렇게 사람들을 속였다.
살다 보니 돈보다 시간이 더 소중해지는 시기가 다가왔다. 그러나 그런 시기는 누구나 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먹고살 만하니 그런 소리 한다고 하겠지만 먹고살 만한 기준도 결국 마음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돈에 속고 싶지 않다. 먼저 간 사람들이 아무리 인생은 짧고 언젠가 끝난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언제나 돈 앞에서 약해진다.
빚이 많은 사람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으로 인생이 의미 없다며 목숨을 버린다. 빚이 없는 사람은 돈이 없어 불행하다며 끝없이 돈을 갈구한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은 당신의 목숨이 가치 없다고 말하고, 항상 부족한 돈은 당신에게 죽을 때까지 일하라고 말한다. 돈은 그렇게 우리를 속인다. 감당할 수 없는 빚도 부족한 돈도 우리의 욕심이 만들어 낸 괴물이 아니었던가?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참가자들은 돈이 없는 세상이 지옥이라고 생각하고 목숨과 돈을 바꾸겠다고 결심한다. 대부분 참가자는 목숨을 잃었고 돈도 얻지 못했다. 차라리 목숨이라도 건졌으면 적은 돈이라도 만져볼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거창한 행복은 아니라도 소소한 행복은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돈은 그렇게 인간을 무참히 속인다.
돈은 애초부터 인생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돈을 인생과 맞바꿀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한 번뿐인 인생과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낸 돈은 처음부터 그 가치가 달랐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돈과 함께 인생의 행복이 찾아온다고 믿고 있다. 나 역시 돈에 속아 그렇게 믿을 때가 많다. 세월이 갈수록 돈의 탐욕에 속지 않으려고 가던 길도 자주 멈춰 선다. 돈을 많이 벌면 다행이지만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이제는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누군가는 돈을 많이 가져보지 못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돈을 벌기 늦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맞바꿀 인생이 그리 많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아직 죽어보지 않았지만, 돈이 죽음과 함께 할 거라고 믿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우뚝 솟은 아파트를 보며 얘기한다. 그때 샀어야 한다고. 그때 샀으면 돈을 더 벌었을 거라고. 한동안 그때 사지 않은 아파트에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많은 가정이 이놈의 아파트 때문에 부부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지금 와서 보니 내가 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한심해 보였다. 그때는 인생이 끝없을 것 같았다. 돈이 자꾸 나를 속인다. 다행히도 나이가 들수록 돈에 잘 속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언제 또 돈에 속을지 모른다. 바람이 있다면 죽는 그 날까지 조금만 돈에 속았으면 좋겠다.
가끔 주말이면 복권가게에 들른다. 가게 안에 사람들은 열심히 나름의 비법으로 번호를 선택한다. 가게밖에 걸려 있는 현수막은 이 가게에서 1등 당첨자가 나왔다고 얘기한다. 돈은 다시 내게 말한다. 당신에게 갈 돈이 저 사람들에게 갈 수 있다고 말이다. 얼른 펜을 집어 든다. 한 번도 효과 없었던 나만의 비법으로 번호를 고른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수백 번 거짓말하면서도 악마의 속삭임에 다시 속는다. 그러나 내 인생 전부를 돈에 걸고 싶지는 않다. 시간을 소소한 행복에도 투자하고 싶다. 먼 훗날 만져보지도 못할 허황한 돈 때문에 인생을 허비했다고 후회하기는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