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 원이 아깝지 않은 이유

돈 21

by 박범진 작가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턱이 닳아 없어지지만, 정승이 죽으면 찾는 이가 없다. 한국의 조직에서 자리는 곧 권력이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 덕분에 누군가는 승승장구(乘勝長驅)할 것이고, 미움받는 누군가는 조직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자리에 있는 사람을 무시할 수 없다.


회사 다닐 때 본부장의 딸이 결혼하였다. 평생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본부장의 딸을 축하하기 위해 황금 같은 주말을 포기하고 서울로 갔다. 솔직히 서울로 갈 수밖에 없었다. 직원들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버스를 전세하였다. 지점장들은 직원들에게 부담 갖지 말라며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들은 맨 앞줄을 차지하였다.


돈만 보낼까도 생각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본부장에게 얼굴도장을 찍어야 했다. 모든 직원의 마음이 내 맘 같았을 것이다. 결혼식장에 도착하니 본부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직원들의 출석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는 평상시 실적이 안 좋다며 직원들을 닦달하더니 그날은 천사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직원들의 수고는 곧 본부장의 재산 증식으로 이어졌다.

한편 누군가가 이번 한 번만 도와달라며 일을 같이하자고 한다. 마지못해 도와주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다른 곳에 가서 뒷담화한다. 자기 이해를 위해 사람을 끌어들여 놓고 조직에 대한 충성도가 없다며 조직을 팔고 다닌다. 끌어들인 사람이 자기를 위해 열심히 일하면 반드시 조직에 필요한 사람이라며 추켜세운다. 그리고 자기가 필요할 때마다 그 사람을 가져다 쓴다.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준 사람이 누군가의 똘마니나 가십거리가 된다면 차라리 도와주지 않는 것이 낫다.

회사를 떠나 학교로 왔다. 그리고 친목 도모를 위해 동호회에 가입하였다. 사람과 운동이 좋아서 가입했는데 어느새 누군가의 이해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그를 도와줬지만, 그는 일을 못 한다는 둥, 혼자만 놀고 있다는 둥 하며 뒷담화하고 다녔다. 그는 학교가 수평적인 조직이라고 말하면서도 자기가 필요할 때는 수직적인 조직이라고 강조한다. 내가 자기의 똘마니가 되기를 바랐나 보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한동안 위장병이 생겨 고생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내 공지 사항에 그의 딸이 결혼한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그리고 마음을 전할 사람은 이곳에 전하라며 큼지막하게 계좌번호를 띄워 놓았다. 딱히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무시하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한동안 보이지 않던 그를 이 건물 저 건물에서 자꾸 마주치게 되었다.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인사를 하였다. ‘나만 따라다니나?’

인사를 안 받을 수도 없어서 참 난감했다. 그는 은근히 이번 주에 자기 딸이 결혼한다며 축하해 달라고 하였다. ‘공지 사항에 한 번 띄웠으면 됐지 굳이 이렇게 대놓고 얘기를 해야 하나!’ 이런 사람은 처음 본다. 나는 결혼을 늦게 해서 우리 아이들이 결혼할 때쯤엔 그가 학교에 없을 것이며 당연히 축의금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축의금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 후 그는 카톡으로 청첩장과 함께 계좌번호를 보내왔다.

‘아! 짜증 난다. 살면서 이렇게 끈질긴 사람은 처음이네!’

그는 내가 결혼식에 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청첩장을 보낸 것은 돈이라도 달라는 것 아닌가!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냥 오만 원을 보냈다. 얼마 후 후배 교수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다. 자기도 카톡으로 청첩장을 받았지만, 돈은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짜증이 확 밀려온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몇 년간 그를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식당에서 그를 마주쳤다. 인사는 했지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축의금 받은 그와 본부장이 부자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제발 내 돈 오만 원 받고 내 인생에서 떨어지길 바란다. 오만 원이면 싸게 먹혔다. 그들과 멀어질 수 있다면 내 돈 오만 원이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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