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2025년 1월 15일. 윤석열 대통령이 체포된 날. 그리고 백수가 된 날.
백수가 된 게 그리 특별한 일이냐고 누군가 물어볼지도 모른다. 내겐 특별하다. 살면서 처음으로 아무런 소속 없이 자유의 몸이 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는 새로운 정체성에 익숙해지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다. 대학생이 돼서도, 군대에 가서도, 대학원에 다니면서도 한결같이 그랬다. 학생처럼 그리고 군인처럼 살아가기 위해 자아를 조율하는 작업을 거쳐야만 했다. 그러다 보면 이런 소리를 듣는다. “너는 할 건 다 하는데, 도대체 왜 그러냐?”
‘그러냐’에 담긴 좀처럼 이상한 그것. 그것이 내 본질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어떠한 옷을 입어도 삐쭉삐쭉 드러나는 무엇. 규율과 규정을 대체로 지키는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전부 어기는 듯한 느낌. 규칙이 아닌 것은 나 몰라라 하는 배짱. 본디 이러한 본성은 마구 요동친다. 하지만 학생 혹은 군인이라는 옷이 덧씌워지면 ‘얼핏’ 잠잠해진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나의 자아가 ‘적당히’ 고요해질 때까지. 방치하면 방만하고 억제하면 폭발하니 융화가 이뤄질 시간이 있어야 한다.
난관에 봉착했다. 백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내 자아와 갈등을 빚고 결국에는 타협을 할 ‘백수’라는 놈에 대해 좀처럼 알 수가 없다. 아침 7시에 기상을 해야 한다거나 야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거나 등의 제한이 없다. ‘무형식의 형식’이랄까. 분명 백수라는 말은 존재하는데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부정을 통해서만 규정된다. ‘직업이 없는 사람.’
백수를 뛰어넘어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 나서는 작업은 필요하다. 구직, 일자리 구해야 한다. ‘백수=부정(nagation)’이란 도식을 가정해보자. 백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 상태를 부정해야 한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 ‘긍정=취직.’ 얼추 맞는 논리다.
하지만 내가 나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게 맞는 것일까. 온갖 부정의 화살을 몸과 마음에 가져다 꽂으면 긍정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 그게 말처럼 쉬웠다면 애당초 백수가 됐을 리도 없겠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백수라는 허어멀건 백지를 채우자. 아름답고 찬란하게. 다시 오지 않을 스물아홉일 테니까.
나는 백수라는 녀석과 타협하겠다. 지금까지 내가 학생과 군인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 조율했던 것처럼. 그것이 본질이 부정이자 ‘무’일지라도 마치 ‘쉐도우 복싱’을 하는 것처럼 가상의 무언가를 세워놓고 그 녀석과 지지고 볶는 나날을 살아가겠다. 그 종착역에 ‘취직’이라는 젖과 꿀이 ‘흐를지도’ 모르는 땅이 있을 것이다. 가끔은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백수 녀석을 무참히 짓밟으면서도 가끔은 화해의 악수를 내밀겠다. 이 글은 이러한 나날을 보내기 위한 축사이자 전선 포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