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백수다] 자기소개라니

by 호재

지난해에 자기소개서(이하 ‘자소서’)를 많이 썼다. 타율이 꽤나 좋았다. 말인즉슨, ‘합격 자소서’ 쓰는 법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소서를 쓰기 싫다. 노트북이 고장 나서 기존에 썼던 자소서가 다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모조리 새로 써야 한다. 귀찮다. 하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여전히 쓰기 싫다. 본질적인 의문이 든다. 무엇을 소개하라는 거지. ‘자기’를 소개하라는데 ‘나’는 도대체 누구지. 내가 정말로 ‘나’를 소개해도 되는 건가. 다음과 같이.


며칠 전, 욘 포세의 <3부작>을 잃었습니다. 재작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책인데 참 좋더라고요. 운문에 가까운 산문이라니. 노벨 재단은 포세의 특유한 형식 때문에 상을 수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아름다웠으니까요. 봄날이 되면 세상이 약간 불투명해 보이잖아요. 이 불투명함을 뚫고 저 대상에 ‘본질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 벚꽃잎이 흩날리는 공간의 보이지 않는 본질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해요. 포세의 글은 정확히 이런 의문과 느낌을 전해요. 꽃잎을 손바닥에 올려봐도 꽃을 감상하며 거니는 사람들의 얼굴을 봐도, 도저히 알 수 없는 그 미묘한 감상. 정체를 알 수 없는 캐노피가 사방에 드리워 있고 오직 이 캐노피를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나.


형식과 내용이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굳이 분리해 본다면 <3부작>에 독특한 내용이랄 것이 있나요. 젊은 남자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젊은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마침내 사형을 당하는 그런 내용, 여자는 남자를 잊지 못해 자살한다. 독특할 것이 없죠. 수도 없이 반복된 사랑 서사죠. 포세의 유려한 문체가 이를 돋보이게 했을 뿐이죠.


<3부작>을 읽은 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어요. 대략 10년 전에 구매한 책인데 이제야 잃다니. 그래도 이십 대가 지나기 전에 완독을 해보고 싶었어요. 이 소설과 포세의 소설에 공통점이 있다면 사랑에 관한 내용이라는 거죠. 물론 포세의 작품에 비해 <노르웨이의 숲>은 상실에 초점을 둬요.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린 후에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따위의 질문을 던져요. 하지만 여전히 ‘사랑’을 바탕으로 서사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3부작>과 차이는 없어요.


사실 별 감흥이 없었어요. 포세의 소설은 대단히 훌륭했으나 내용의 측면에서 대단한 게 없었고 무라카미의 소설은 뭐랄까, 답답했거든요. 주인공에게 이입이 되지 않았나, 라고 자문을 하기도 했어요. 분명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했던 것 같아요. 죽은 친구의 여자 친구를 사랑하게 된 주인공. 그녀는 애인을 잃은 후유증 때문에 정신 질환에 걸려 요양을 떠나요. ‘어쩌다가’ 주인공과 그녀는 사랑에 빠져요. 하지만 그녀에게는 회복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어요. 주인공은 일주일마다 편지를 써 보내며 재회를 그리지만 소설은 그녀가 자살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돼요. 주인공은 그를 좋아하던 다른 사람과 미래를 그리게 되고.


분명 대단한 작품들인데 나는 왜 이들에 동감하지 못하지. 내가 사랑 서사에 약한 사람인가. ‘대중 정서’를 나는 왜 따라가지 못하지. 뻣뻣하고 떨떠름한 <이방인> 같은 소설을 훨씬 더 선호하는 나는 누구인가. 그래요.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시류와 자연스레 섞이지 못하는 사람. 이유를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다고 답변하는 사람. ‘그냥 그게 내 취향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타인의 취향을 맛보는 사람.


이렇게 자소서를 쓴다면 어떤 회사에서 받아줄지 의문이다. 물론 ‘문항’이라는 게 존재한다. 제한을 가하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에 맞게 자기소개를 하되, 너를 솔직히 보여라’라는 지시다. 이 과정에서 과거를 ‘선별’ 해야 한다. 이를테면, <3부작>과 <노르웨이의 숲>을 잃으면서 내가 스스로 ‘나’라고 자문자답한 과정은 불필요하다. 인문대에 나와서 먹고살려고 이런저런 일들을 벌이다가 지금은 백수가 돼버린 현실을 써내는 것도. 나를 깎고 잘라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그들의 입장’에서 상품성 좋은 몇몇 경험이 남는다. 이들을 자소서에 옮겨 적는다. 반복한다. 능숙해진다.


반복하다 능숙해지면, 그게 자신인 줄 안다. 내가 나를 잃어버린다. 잃어버린 만큼 또 다른 나를 취득한다. 취득한 나는 일종의 기계 같다. 유사한 시간에 유사한 일을 되풀이한다. 외부에서 자극을 받으면 유사한 반응을 보인다. 이른바 유사-기계가 나를 장악한다. 스스로에 대해 자문하지 않는다. 비난할 일은 아니다. 실제로 이러한 과정이 이뤄지는지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그렇다고 주장할 뿐이다. 생각이 극단으로 치닫는다. 다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건가.


세상에는 일종의 ‘리듬’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 박자를 정확하게 헤아리긴 어렵지만, 대충 알아챌 수 있을 것 같다. 오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덕분에 ‘엇박’이 보인다. 요구에 부응하는 답변이 아닌, 질문과 한 쌍으로 존재하는 답변. 오직 스스로 던지고 스스로 답하는 이들이 있다. ‘의외’의 재미를 선사하는 사람들. 그렇게 자유를 향유하는 사람들. 가끔 상상한다. 오직 ‘탈’이라는 접미사를 붙인 채로 존재하는 실체들이 주류의 위치의 점할 날들을. ‘자기소개’를 자기소개답게 할 수 있는 그날을 꿈꾼다. 불가능하리라고 확신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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