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습관처럼 좋아하는 법을 모른다. 좋아하기 위해서는 큰 힘을 들여야 한다. 힘을 들이지 않으면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고 생각한다. 참 극단적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좋아지긴 한다. 문제는 그 시점을 예측할 수 없다는 거다. 좋아했다가 싫어했던 무언가를 언제쯤 다시 좋아할 수 있을지 나조차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고 또다시 흐르다 보면 그리워지는 때가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이쯤이면 다시 좋아해야만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다시 좋아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다고 막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스며들 듯이 점점 좋아진다. 언젠간 다시 싫어지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나에게 좋아한다는 일이란 일종의 당위이자 의지요, 책임이다.
글 쓰는 일이 잠깐 싫어졌다. 힘을 들이기 싫었다. 물론 핑곗거리가 있다. 자기소개서를 열심히 썼다. 지지난주 일요일부터 지난주 수요일까지 세 개의 자소서를 썼다. ‘복붙’하면 그만이겠지만 75%는 새로 썼다. 노트북이 망가져 기존에 썼던 자소서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소서마다 문항이 다르기도 했다. 지난주 월요일 즈음에 감기 몸살이 걸렸다. 아프니까 해야 하는 일만 하게 됐다. 신문을 읽고 자소서를 썼다. 병원에 다녀왔고 밥을 지었다. 집안일을 한다거나 스터디 카페에 가는 일은 포기했다. 영원히 이렇게 살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주 목요일에는 올해 처음으로 봤던 입사 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다. 불안해졌다. 패배자가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찌질해 보이니까. 내색할 사람이 없던 것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은 있었다. 쪼개고 쪼개다 보면 나오는 게 힘인 법이니까. 글을 쓸 수 있을 만큼의 힘은 남았다. 나는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글을 쓰지 않았다. 글이 싫어졌던 것일까. 그랬던 것 같다.
‘좋아하는 것도 이따금 싫어지는 법이 있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성립가능한 것일까. 좋아하는 동시에 싫어하는 일이 동시에 성립한다는 것인데 참말로 이상하다. ‘좋아한다’와 ‘싫어한다’가 반대 관계가 아닐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두 말은 반대말이 아닌가. 혹시 착각하고 있던 걸까. 애증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 다른 두 의미가 한 단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좋아함과 싫어함은 반대말이지만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말일까. 그렇다면 나는 글을 싫어서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좋아하지만 동시에 싫어했고 그래서 쓰지 않은 것일 수도.
하지만 무언가를 좋아하기 위해 큰 힘을 들여야 하는 나로선, 이런 식의 논리가 버겁다. ‘좋아하면서 싫어할 수도 있지’라는 단순한 문장 이상이다. 무언가가 갑자기 싫어지면 신경이 쓰이고 나의 진심을 톺아보고 다소 심란해진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싫어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편이 낫다. 적어도 미련은 없어지니까. 나를 되돌아볼 수 있고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수 있고 미래를 새로 계획할 수 있으니까. 산다는 건 그런 것이겠거니 체념할 수 있으니까.
잔잔하게 좋아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부럽다. 몇몇 봤다. 큰 동요 없이 묵묵하게 살아내는 사람. 선인장을 가꾸 듯 취향을 가꾸는 사람. 취향이 취향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는 것조차 모르지만 일에 열중인 사람. 타올라야만 살아감을 느끼는 나로서는 신기하리 만큼 잔잔한 사람.
엊그제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날씨가 추워서, 적절한 루트를 찾지 못해서 등 핑곗거리가 있었고 그래서 달리기를 위한 힘이 없다고 생각했다. 달리기를 그만뒀다. 싫어했다. 달리기를 좋아하냐고 누군가 물어보면 가끔 망설였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과 함께. 너무나도 사소한 ‘좋아함’에 대한 나의 철학. 작고 연약하지만 그래서 더욱 잘 보이는 법이다. 마치 하얀 종이 위의 검은 점처럼. 나는 그 점 속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