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좀처럼 떠나가지 않았지만 필사적이었다. 완성해야 한다는 절박함. 글을 쓸 당시에는 이러한 감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다만, 5천여 자를 넘게 쓰고 시험을 끝마쳤을 때, 기진맥진해 있었다. 누군가에게 두드려 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시험장에서 나오니 오후 한 시 무렵이었다. 봄날이 다가오려나. 제법 따스한 햇살이 내리쬈다. 토요일이라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지만, 그저 집에 가고 싶었다. 더 이상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짓거리를 얼마나 더 해야 할까, 끝은 존재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떡볶이를 포장 주문했다. 매콤한 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까, 라는 하찮은 생각 때문이었다. 어림없었다. 배만 불렀다. 침대 위에 누워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다. 언제 무엇을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선잠을 자다가 휴대폰 보기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다른 회사의 시험도 몇 차례 남아 있었지만 도저히 힘이 나지 않았다. 삭신이 쑤셨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하지 않았다.
오후 5시가 됐을까, 빨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빨래를 했다. 세탁기가 있지만 두툼한 기모 후드티를 손으로 주물러 댔다. 하다 보니 욕심이 났다. 한 번이라도 입은 옷을 모두 꺼내 손으로 빨았다. 수건도 빨았다. 삶는답시고 팔팔 끓는 뜨거운 물을 부어 불렸다. 발로 짓이겨 밟았다. 탁한 구정물이 나왔다. 그런 수건으로 살갗을 닦아 왔다는 사실에 싫증이 난 것은 아니다. 대개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빨랫감이 잘 마르지 않는 계절이다. 더군다나 나의 집은 습하다. 대량으로 빨래를 했을 때에는 빨래방에 가서 건조기를 돌린다. 오늘도 그랬다. 제기랄, 오천 원짜리 지폐를 오백 원짜리 동전으로 바꾸려 했는데 기계가 지폐를 먹질 않았다. 꾸깃꾸깃해서 그랬나. 근처 편의점에서 새콤달콤 포도맛 하나를 샀다. 새콤달콤이 오백 원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다행히도 기계는 천 원짜리 네 장을 잘 먹은 뒤 오백 원짜리를 토해냈다. 건조기를 돌렸다.
빨래를 끝낸 뒤 저녁으로 얼린 미역국을 데워 먹었다. 며칠 전에 만든 겉절이를 함께 내어 놓았다. 처음 시도한 겉절이었는데 꽤나 괜찮았다. 식사를 마친 뒤, 아침에 씻어 놓은 방울토마토를 먹었다. 시험을 보러 가기 전에 빵과 함께 먹으려고 했지만 포기했던 토마토였다. 아침을 먹지 않은 것이 습관이 돼 빵을 먹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시험을 보는 도중에 배가 고플까 봐 입 속에 억지로 욱여넣었다.
망설였다. 달리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하지 않으면, 잔잔하게 드리우고 있는 두려움이 계속될 것만 같았다. 두려움일까, 이 신체력 무력감을 두려움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맞을까, 따위의 질문을 제쳐둔 채로 뛰었다. 사 킬로미터 남짓을 뛰었다. 뛰기 직전과 뛰는 도중에는 생각이 무척 많아지는 법이다. 하지만 고민은 가파른 호흡과 함께 희석돼 간다. 그렇게 자취를 감춘다. 흠뻑 젖은 티셔츠만 남는다.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는 말은 거창하다. 인내일까, 체념일까. 산다는 건 그중 어중간한 어느 지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니, 직감한다.
지금은 홀로 술 한 잔을 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술을 마치면 솔직해진다고 믿는다. 솔직해질 정도까지만 마시는 것이 관건이지만. 어쩌면 이런 순간이 내게 가장 행복하다고 믿는다. 나와 대화를 하는 것 같달까. 과장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자유롭다. 타자를 두드리는 손가락에 부담이 없다. 지우고 싶은 활자는 지우면 되고, 쓰고 싶은 단어는 마음껏 쓰면 된다.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는다. 나의 양심조차도 무어라 하지 않는다. 그래서 행복하다고 믿는다.
삶은 어찌어찌 굴러간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가끔씩 두려워질 때가 있다. 같은 시절이 반복될까 봐.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까 봐.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때 나의 삶은 어떻게 될까, 라는 의문과 함께. 물론 원하던 탈출구가 아니더라도 어느 곳으로든 나오게 돼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나는 삶에 딱히 기대를 하는 인간도 아니거니와, 타인의 기대 또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래서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마다 다짐한다. 이 감정이 별 것 아니라고, 그저 살아가면 될 뿐이라고 다만, 도전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미련이 없을 때까지 시도해 보기로. 나는 내일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