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연할 줄 알았다. 이곳을 어림잡아 서른 번은 방문한 것 같다. 자주 올 땐 일주일에 한 번씩 왔다. 질릴 정도로 자주 왔던 만큼, 어떠한 동요도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불길한 긴장이 안개처럼 드리운다. 반 년만에 다시 왔음에도 적응을 못했나 보다. 아니, 나 자신과 했던 약속을 져버려서 그런 걸까. 이곳을 내 집처럼 드나들던 시절에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삶은 어떻게든 흘러간다는 것을, 그러니 위축되며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저 살아가면 될 뿐이라는 것을.
벌써 두 해가 흘렀다. 지지난해 겨울, 엄지 손톱을 부러질 듯이 세게 눌렀다. 순식간에 금이 생겼다. 손톱이 절반으로 쪼개졌다. 사실, 내 손톱이 멀쩡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옅은 검은색 세로줄이 있었고, 자라면서 점점 굵어졌다. 대학 졸업 전후로는 손톱이 쪼개질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병원에 가지는 않았다. 별일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터넷 상에는 불길한 징후일 수도 있다는 말이 나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 손톱이 쪼개지고 난 후에야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여의도 가톨릭성모병원에 방문했다. 예약이 빼곡히 차 있었기 때문에 손톱이 갈라진 지 한 달 반이 지난 뒤에야 내원할 수 있었다. 의사는 젊으니까 별 일 없을 것이라며, 점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하지만 검사는 해야한다고 했다. 손톱의 뿌리 부분을 채취해 조직 검사를 했다. 그 아픔에 대해서 세세히 기술하기는 싫다. 다만, 마취를 하더라도 맨손톱을 잘라내는 일은 여간 아픈 것이 아니었다. 오 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식은땀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호흡하면 괜찮아질까, 라는 생각에 숨을 내어 쉬었지만 어림없었다.
다시 병원에 방문했을 때, 의사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젊어서 별 일 아닐 줄 알았는데, 이상이 있다고 했다. 흑색종일 수 있다며 큰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밀 검진을 받아야 한다며, 자신이 아는 선생님께 연락을 보내놓겠다고 했다. 당황했을까. 일 년이 넘은 지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흑색종은 암이었고 죽을 수도 있는 병이었다. 어쩌면 그 순간에 나도 죽는 걸까, 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이런저런 서류를 발급받는 과정에서, 꽤나 심각한 문제임을 직감했다는 것이다. 병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녔고 그 장소는 대개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일사천리였다. 며칠 뒤 신촌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에 갔다. 다시 조직 검사를 받았다. 피부가 악성종양으로 바뀌고 있다는 결과를 받았다. 수술을 해야한다고 했다. 확률에 대해 들었다. 의사는 종양이 피부 깊이 침투했을 경우, 온몸으로 전이됐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땐 몸 이곳저곳에 있는 절개해 검사해야 한다고 했다. 그 깊이는 0.5mm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0.5mm, 굉장히 얇은 두께였다. 의사는 10명 가운데 3명은 전이된 것으로 나온다고 말했다. 30%였다. 30%에 나의 이십 대 후반이 달려 있었다. 어쩌면 인생이 걸려 있을 수도.
병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검진을 받았다. 다섯 곳 가량의 진료과를 돌아다닌 것으로 기억한다. 병원 날짜가 잡혔다. 사흘 뒤였다. 이토록 우람하고 거대한 병원에서 내게만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 같았다. 대형 병원이라면 검진이나 수술을 받기까지 적어도 몇 달은 걸릴 터인데, 일사천리였다. 빠르니 불길했다. 죽을 수도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중력이 몇 배로 늘어난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웠다. 앉아 있기도, 누워 있기도 싫었다. 어떤 자세로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모든 순간이 부자연스러웠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가만히 있는 사물을 보는 것조차 어색했다. 세상이 울렁거린달까. 남들 앞에서 드러내진 않았다. 하지만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두렵다거나 불안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웃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투병을 하며 ‘무한도전’을 봤다는 이들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타인의 위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몰린 삶 속에서 타자의 존재는 불투명했다. 오직 나 홀로 존재했다. 어떤 외로움과 고통은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유재석이 나오는 ‘핑계고’를 온종일 틀어놓고 봤다. 밥을 먹을 때도 자기 직전에도 핑계고를 봤다. 살아가고 죽어간다는 사실 자체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하염없이 깔깔댔다. 웃음과 유머와 장난만이 성스러운 전부였다. 하잘 것 없는 농담을 들으며 수술 날이 다가오길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