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온 집에는 아무것도 없다. 가구를 사야 하는데 당장 급한 건 아니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금방 배달되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 당장 필요한 건, ‘루틴’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거주하는 동네를 ‘체화’하는 것, 그래서 당황하지 않고 백수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그의 저서 “지각의 현상학”에서 (아마도)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는 인식 체계를 제시하려고 했다. 우리는 대상을 지각할 때, ‘순수 지성’의 상태에서 지각하지 않는다는 것. 즉, 육체를 통해 세계를 마주한다는 것이다. 이게 당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정신(=이성)을 우위에 둔 서양철학사의 맥락에서 보면 다소 혁신적인 생각이다. 르네 데카르트 이후 서양 철학의 헤게모니는 정신이 잡았으니.
하지만 정신만으로는 부족하다. 가령, 자동차를 운전할 때, 운전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어떤 메커니즘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자동차와 마치 ‘한 몸’이 된다. 체화된 지식이라고 해야 할까. 메를로-퐁티의 철학은 기존의 서양 철학과 달리 이 지점에 관해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 정말로 신기하지 않은가. 내가 동네를 체화하려고 하는 ‘거창한’ 이유다.
그래서 이사 온 뒤로 무엇을 했느냐. 별 것 없다. 주변을 정처 없이 탐색했다. 다만, 지도 앱을 거의 켜지 않았다. 발길이 닫는 대로 갈 뿐이다. 이를테면 집에서 얼마간 떨어져 있는 어린이대공원을 간다손 칠 때, 처음 딱 한 번만 지도를 본다. 큰 길을 따라 어린이대공원에 간다. 공원에 가서도 공원 안내도를 한 번만 본다. 가장 외곽 길이 있고 그 내부에 촘촘하게 길이 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처음에는 외곽 길을 한 번 돌고, 나머지는 그저 헤맨다. 외곽 길을 돌다가 모르는 길로 빠져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걷는다. 그렇게 거닐다 보면 어느새 공원 출구에 도착한다.
다음 번에 공원에 갈 땐 큰 길로 가지 않는다. 이제 어린이대공원에 도착할 것 같은 경로로 걷는다. 우리 집과 공원 사이에는 미로 같은 자취촌이 있다. 계속 헤매며 걷는다. 지도를 보지 않고 나름의 질서를 확인하려 한다. 물론 한 번에 알아챌 수는 없다. 어린이대공원을 몇 차례 가다보면 미로를 여러 번 서성이게 되고 그러면 도로의 질서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어린이대공원으로 향하는 길이 체화된다. 나의 정신과 육체는 공원을 포함한 온 동네에 적응한다.
공원 가는 길목에 있는 청년 센터를 목격하기도 한다. 센터에 뻘쭘하게 들어가 (처음 방문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눈은 책을 뚫어져라 보고 있지만 정신은 커피 머신으로 향해 있다. 거리낌 없이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 있으면 신경을 그곳에 집중한다. 컵의 위치와 얼음을 가져오는 곳 따위에 대해 파악한다. 가끔씩 다른 사람이 어떤 공부를 하는지 힐끔거린다. 자격증 따위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괜스레 우월감을 느낀다. 어차피 똑같은 처지임에도. 이러한 체계를 파악하는 것은 하루면 된다. 다음날에는 센터에 수십 차례 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다.
도서관에 가서 도서관 대출증을 만든다. 그곳에서도 나처럼 ‘백수’같은 사람들을 본다. 안심한다. 편의점에 가서 점장처럼 보이는 아저씨의 소름 끼치는 친절함에 감탄한다. 근처에 있는 세종대학교를 거닐며 마치 프랑스의 어느 소도시를 걷는 듯하다는 감상에 젖는다.
무엇보다, 아무 곳이나 간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성수 인근에 도착한다. 예전에 성수에서 하남까지 걸어가던 도중 지나쳤던 길목이 보인다. 어떤 길은 건국대학교로 이어진다. 건대에 들렀을 때, 어디로 이어질지 궁금했던 길이 우리 집 방면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안다. 세상에 모든 길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맞다. 그 호기심을 매몰차게 일축해 버리고 살았던 것이다.
동네방네 헤집고 다니며 나를 동네에 물들게 한 일, 혹은 그 반대, 그것이 군자동에 와서 처음으로 한 일이다. 그리고 매정했던 내게 냉소를 지으며 육체를 접착제 삼아 분열된 거리를 다시 끼워 맞추는 일, 그것이 군자동에 와서 처음으로 시도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