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G. 제발트의 “이민자들”
W.G. 제발트의 연작소설 “이민자들”은 제목 그대로 이민자들에 관한 소설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고향은 떠나야만 했던 네 인물의 일대기를 다룬다. 그중 셋은 유대인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 모두 유대인 학살 사태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모 등 그들과 연관된 사람들이 나치로부터 피해를 받았지만 개개인은 이러한 사태와 얼마간 떨어져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상처를 입는다. 나치즘을 피해 자신이 살던 고향을 벗어난다. ‘보통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 심리적 트라우마로 정신의학 진료를 받거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를 겪는다. 자살을 하는 인물도 있다. 이렇게 인물들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하지만 소설이 이 부분에만 집중하는 것 같지는 않다. 묘사가 구체적이고 문체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의 삶을 서술하는 장면에서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진다. ‘고향’이라는 맥락 속에서 인물의 일대기를 제시하려는 의도 또한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고향은 어떤 ‘방식’으로 제시될까? (물론 네 인물이 처한 상황은 제각각이다.) 바로 간주관적인 집합으로 표현된다. 화자와 인물, 그리고 상상이 함께 고향의 모습을 구성해 나가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소설의 화자가 인물의 생애사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화자는 인물을 통해 아름다웠던 고향의 모습을 전해 듣는다. 그리고 그곳에 방문해 과거의 흔적을 파악한다. 수십 칸에 달하는 규모의 호텔이라든지 한 때 호황을 누렸던 산업 도시의 모습이라든지. 하지만 지금은 텅 비어 버렸다. 오직 과거의 영광을 상상할 뿐이다. 환상의 이미지는 다시 이민자 개개인의 삶의 궤적과 접합된다. 그리고 독자는 고향에 대한 묘사와 화자와 인물의 대화 가운데서 고향의 이미지를 발견해 나간다.
작가는 왜 간주관적인 관점으로 고향을 제시하려던 것일까? 하나의 인물의 시각에서 글을 써내거나 3인칭적 시점을 택할 수도 있었다. 허구와 사실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작가가 소설을 쓴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간주관적으로 고향을 기술하지 않아도 그 목표를 충분히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인물이 과거의 고향에 대해 회상하고 이를 현실과 대비한 후 그 자취를 밟아가는 식으로 소설이 전개돼도 이상하지 않다.
‘고향’은 그 자체로 간주관적인 통일체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마냥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완전히 객관적인 것도 아닌, 상상과 주관이 모여서 객관의 심급에 도달한 무엇. 수많은 인물들의 시선과 관점이 교차해 나갈 때 고향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고향은 일종의 공동체성 혹은 집단성을 함축하고 있는 셈이다.
‘고향 상실’은 정반대의 과정을 취한다. 교차성이 사라지면 고향의 존재는 흐릿해져 간다. 사람들이 사라진 폐허가 될수록, 상상이 빈곤해질수록 고향은 그 지위를 잃게 된다. 고향을 구성해 낼 요소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민자들”은 ‘고향 상실’에 관한 소설이 아니다. 각 인물은 과거를 회고하며 함께 고향의 이미지를 구축해 나갈 사람인 화자가 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빈곤할지라도 ‘고향 이야기’는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이민자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야기’보다 ‘빈곤함’에 집중했다면? 나치로 인한 피해와 상처로 치유 불능의 상태였다면? 고향 이야기가 박탈감을 불러일으키는 고통에 불과했다면? 이 때문에 모든 연작이 비극적으로 끝났다고 추정해본다.
‘고향’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어진다. 과거로 회귀하는 상상의 여정 속에서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는 것. 지난 27일에 조선일보 지면 신문에 실린 ‘멕시코 갈 땐 1분, 미국 돌아올 땐 2시간… 더 높아진 장벽’의 일부와 함께 글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상당수의 난민들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검문소 근처 난민 보호소에 머물고 있다. 티후아나 난민 보호소에 가족과 머물고 있는 호아킨 라미레 살가도씨는 “언제 국경이 열릴지 모르지만, 치안이 열악한 고향(미초아칸)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