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 백수가 바라보는 명절
“취직은 언제 하려 하니?” 우리 집안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말이다. 2년 전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공부를 더 하고 싶겠거니, 하는 눈치였다. 학부 때 미래가 없는 인문 계열을 졸업해서 그런가, 기대가 없었다. 외려 사회과학 계열의 대학원에 간다고 하니 취직은 되는 거냐고 물었다. 대학원의 특성상 양성하려는 직업군이 뚜렷했다. 약간의 희망을 보았던 셈이다. 스물 아홉 백수가 됐어도 분위기는 다르지 않다. 그러려니 한다. 쟤도 놀고 먹으며 살았던 게 아닌데 어딘가에는 취직하겠지, 하는 분위기다.
그래서 그런가. 내게 명절은 ‘친인척이 부담을 주는 계절’이 아니다. 그럼에도 명절이 싫다.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누적돼 온 무언가. 명확한 사건은 아니다. 엄마와 아빠가 명절 때마다 싸운 건 수차례 반복돼 왔다. 이젠 익숙하다. ‘명절 음식’도 아니다. 이제 엄마는 명절 음식 하기에 통달한 수준이다. 잽싸게 해낸다. 고사리와 시금치, 숙주를 순식간에 무쳐내고 전은 아쉽지 않을 만큼 부친다. 아빠가 손을 대면 망하는 게 예사다. 그럼에도 아빠가 텔레비전만 뚫어져라 쳐다보면 엄마는 잔소리 한다. 우리 집 제사도 아니라며. 싸움이 시작된다. 당연히 일방적이다.
반복이다. 한 해에 사흘씩 두 번, 모두 엿세 주어진 ‘빨간날’이 모두 같은 모양새로 시작되고 끝난다는 게 싫다. 물론 많은 것들이 변했다. 명절 당일에 할머니 댁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현저히 줄었다거나, 제사의 규모가 축소됐다거나, 어릴 적 같이 놀던 친인척이 나이를 먹고 그 천진난만함을 잃었다거나. 하지만 사소한 문제다. 본질은 변함없다. 이런 것과 같다. 신체의 곳곳을 로봇으로 갈아 끼운 사람. 팔이 로봇이고 눈이 로봇인 사람은 로봇이 되기 이전의 그와 같을까. 그가 지닌 기억이 과거의 그와 같다면 그는 여전히 그일 터다. 명절도 똑같다. 변한 건 있지만 핵심은 똑같다.
세상은 변하는데 명절 지내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며 투정을 부리는 건 아니다.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의 서사처럼 제삿날을 해외에서 보내고 싶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정확히 반복될 것이라는 ‘믿음’이 싫다. 또다시 반복될 것처럼 설을 보내고 추석을 보내는 게 싫은 거다. 하지만 그럴 거란 기대가 너무나도 잘 보인다. 명절 때마다 방문하던 누군가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못 왔을 경우, 그 때 드러나는 실망한 눈빛이. 이 담담하지 못한 기색이 나는 싫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사실은 진리다. 그 진리에 대비하지 못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우린 모두 알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면 몹시 슬프다. 명절 때 부재로 인해 아쉬움을 느낀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왜 명절이어야만 하는 것일까. 명절 때이 다가오면 방문하던 사람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또 오리라고 기대하는 것일까. 명절이 아니더라도 다른 시간은 많은데. 명절은 내가 모르는 강력한 마법 같은 힘이 있는 것일까.
지나치게 냉소적인 것일까. 무언가가 다시 되풀이 되길 바라지 말아야 한다는 것. 반복돼 오던 일이 어느 날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섣불리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 명절 뿐만 아니라 삶이란 것이 온통 그런 일들 투성이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래서 나는 어렸을 적부터 엄마와 아빠와 동생이 집 밖을 나갈 때, 항상 ‘다녀오라’는 인사를 했다. 다시 ‘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이 반복되리라는 믿음을 가지려면 그 정도의 각오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어른들은 모른다. 명절은 반복될 것이며 옆집도 다음 명절에 시끌벅적할 것이니 우리 집도 시끌벅적할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 얼굴을 비췄던 사람이 다음에 또 올 거라고 기대한다. 서글프다. 그들도 세상에 한결같이 반복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같은 일이 또 다시 일어나길 소망한다.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다. 요즘 내 또래 친구들은 명절을 휴일로 인식한다, 그래서 명절을 보내러 굳이 집에 안 가는 경우가 많다,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어른들은 점차 쓸쓸해질 것이며 각오해야 한다, 라는 식으로. 다만, 우리 집안은 어떻게 될까. 시끌벅적한 명절이 점차 쪼그라드는 것을 목격해 왔다. 명절은 점차 탈락돼 투명한 구슬에 가까운 것이 될까. 엄마와 아빠도 할머니 댁에 가지 않아 시골 마을이 고요해지는 날이 올까. 아니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명절은 그 구색이라도 갖춘 채 반복될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명절을 어떻게 맞이할 것일까. 이 명절의 종착역은 어디일까.